2015
7-8월호

주식시장 상장 철회로 회사를 살린 토미힐피거 CEO
프레드 게링(Fred Gehring)

How I Did It…

주식시장 상장 철회로 회사를 살린

토미힐피거 CEO

 

The Idea

 

‘프레피 패션[1]으로 알려진 토미힐피거는 1990년대에 미국 시장에서의 과도한 확장 이후 가파르게 쇠퇴했다. 게링은 PEF와 함께 회사를 통째로 사들였다. 단기적으로는 사업을 축소하면서 전열을 재정비해 마침내 장기적인 성장을 이끌어냈다.

 

 

[1]아이비리그 스타일을 기본으로 한 캐주얼하고 현대적인 형태의 패션 스타일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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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한 자선모금 행사에서 선보였던 캐주얼 웨어

 

가 토미 힐피거Tommy Hilfiger를 처음 만났던 1990년 그는 이미 패션업계의 유명 인사였다. 1960년대 말 대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뉴욕 주 북부에 사는 평범한 10대였던 그는 동네 옷가게에서는 구할 수 없는 유행에 민감한 옷을 접하고 싶었다. 그래서 몇몇 친구들과 뉴욕시까지 운전해서 수십 벌의 나팔바지와 히피패션의 옷을 구입해와서는 그의 폴크스바겐 트렁크에서 팔곤 했다. 스무 살이 되기 전, 토미와 그의 동업자는 피플스 플레이스People’s Place라는 옷가게를 차렸다. 이 매장은 점차 체인점 형태로 규모를 확대해갔다. 1980년대 중반 뉴욕시로 옮겨 자신의 브랜드 론칭을 도와줄 후원자를 찾게 된다. 클래식한 미국 동부 스타일에, 그가 살았던 캘리포니아의 캐주얼하고 자유분방한 느낌을 결합한 브랜드를 출시했다. 1985년 그의 광고대행사는 뉴욕 타임스퀘어 광고판에 토미힐피거를 캘빈클라인, 랄프로렌 및 페리앨리스와 비교하는 광고를 실었다. 매우 대담한 시도였다. 이를 통해 그는 패션 업계에 이름을 알리게 됐다. 그리고 그런 자신감에 맞는 창의적인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1990년대 토미힐피거는 가장한 패션 브랜드 중 하나로 위용을 떨쳤다. 1996년 나는 힐피거의 제품을 유럽에 판매하는 라이선스를 가진 스타트업의 파트너가 되면서 힐피거와 인연을 맺었다. 그 당시 토미힐피거의 미국 내 사업은 정말 잘나갔다. 1997년부터 2000년까지 매출은 두 배 이상 상승했고 주식시장에서도 순항했다. 하지만 곧 이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됐다. 토미힐피거에 대한 반응은 너무나도 뜨거웠고 엄청난 물량의 광고 덕분에 성장세 또한 대단했다.

 

그러나 미국 시장에서 팔리는 토미힐피거 제품들이 브랜드의 핵심가치에서 벗어나면서 수요가 감소하자 가격 할인이 빈번해졌고, 그러면서 디자이너들이 아예 할인매장에나 어울리는 스타일의 옷을 디자인하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2000년대 초반까지 힐피거의 미국 매출은 매년 감소했다. 새로운 CEO가 임명됐다. 그는 회사를 살리기 위해 과감한 인수합병을 통해 토미힐피거를 멀티 브랜드 기업으로 바꾸겠다고 공표했다. 내 생각엔 잘될 것 같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업 회생 작업을 시행할 때 가장 큰 걸림돌은 주주들의 기대감이다. 상장기업은 매 분기 성장해야 한다는 주주들의 압력을 받는다. 수익성 있고 지속가능한 비즈니스를 일궈내기 위해서는 때때로 사업 규모의 축소가 불가피한데, 이는 회사가 주식시장에 상장된 상태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토미힐피거의 전략을 세우기 시작했을 때는 회사를 매입해 비상장기업으로 바꿀 프라이빗에퀴티[2]회사를 찾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토미힐피거의 핵심가치를 되찾기 위해서는 이 계획을 이사회에 납득시키는 방법밖에 없다고 믿었다. 여전히 나는 내 결정이 옳았다고 확신한다.

 

토미와 나는 잘 맞는 동료였지만 우리의 성장 배경은 꽤 달랐다. 나는 네덜란드에서 자랐고 경영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에는 해외에서 근무했다. 뉴욕에 가기 전 홍콩과 온두라스에서 각각 1년씩 보냈다. 1980년에서 1983년까지는 다이아몬드를 거래하는 일을 했는데 시장가격이 폭락하면서 사업을 접어야 했다. 그 후 4년간 나는 독립 컨설턴트로서 미국 시장에 진출하고자 하는 유럽 회사들을 자문해줬다. 그때 처음으로 의류사업을 경험했다. 1985, 홍콩의 전설적인 투자가인 사일러스 추Silas Chou를 만났다. 랄프로렌과 마이클코어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의류회사에 투자한 사람이다. 1987년 사일러스는 나에게 암스테르담으로 돌아가 본인이 관심을 쏟고 있던 폴로 랄프로렌의 유럽시장 사업을 맡도록 했다. 나는 4년간 그 일을 했다. 1992년부터 1999년까지는 사일러스와 그의 파트너이자 캐나다 패션업계 거물인 로렌스 스톨Lawrence Stroll이 인수한 영국 기업 페페진Pepe Jeans을 경영했다.

 

 

[2]프라이빗에퀴티 펀드는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사모(私募)펀드라고 번역되나 해외에서는 비상장 회사(private company)에 투자하거나 상장회사를 통째로 사들여 상장 철회시킨 후 구조조정을 통해 기업가치를 올려서 되파는 펀드를 지칭한다 - 편집자 주

 

 

1980년대 후반 사일러스와 로렌스는 유럽의 랄프로렌 사업을 매각하고 토미힐피거의 대주주가 됐다. 토미는 브랜드와 상품전략을 관장할 만한 창조적인 비전과 머천다이징 감각을 가졌지만 회사를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훌륭한 사업 파트너들과 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사일러스가 그런 전문 지식을 제공했다. 1992년 회사는 성공적으로 주식시장에 상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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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남성 가을겨울 시즌 테일러드 컬렉션

 

브랜드 가치가 퇴색할 때

그 후 수년간 페페진을 운영하면서 우리는 유럽의 많은 패션 소비자들이 뉴욕 여행 시 토미힐피거 상품을 구입해서 돌아오는 것을 발견했다. 유럽에서 토미힐피거의 인기는 대단했다. 사일러스와 나는 유럽 판매 라이선스를 취득하기 위한 협상을 시작했고 1996년에 계약을 체결했다. 우리는 몇 년간 클래식한 프리미엄 상품으로서의 핵심 DNA를 고수하자는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미국에서의 토미힐피거는 이른바스트리트 웨어분야로 확장하고 있었다. 배기진(헐렁한 청바지)과 아주 커다란 로고가 달린 옷들을 팔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전통적인 토미힐피거 제품들이 쌓아 올린 브랜드 가치를 바래게 했다. 브랜드가 너무 많이 성장하고, 너무 유명해지고 나면 흔한 제품이라는 인식이 브랜드에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2000년에 브랜드 가치가 미국 시장에서 정점을 찍은 이후 회사는 시장에서 저항을 느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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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산업에서 수요의 약세는 가격 할인으로 이어진다. 할인이 장기화되면 구조적인 문제가 나타나는데, 이는 디자인 프로세스에 영향을 미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내가 예를 하나 들어 주겠다. 수년간 토미힐피거의 디자이너들은 89달러짜리처럼 보이는 79달러짜리 셔츠를 만들어 팔았다. 그러나 시장에서 브랜드가 외면당하기 시작하자 소매업자들은 판매를 위해 제품가를 49달러까지 낮춰야 했다. 49달러로 이익을 내기 위해서는 재질, 스타일 및 품질을 상당히 양보해야 했다. 할인을 염두하고 디자인을 하면서 브랜드 가치는 점점 더 퇴색했다.

 

비공개 기업으로 전환하고 18개월 만에 우리는 거래소 재상장을 위한

로드쇼를 계획했다.

 

당시 내가 이끌던 유럽사업부에서는 저가 품질의 제품을 판매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유럽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99달러 셔츠가 마치 150달러짜리 옷처럼 보여야 했다. 2001년도까지 토미힐피거의 미국 사업부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는 조치들을 단행했다. 우리는 자체 디자인센터와 공급망을 만들었다. 2000년부터 2006년까지 힐피거의 미국 매출은 매년 하락한 반면 유럽 매출은 매년 대략 50%씩 성장했다. 처음엔 우리의 성공을 알아차린 사람이 거의 없었다. 연 매출 약 20억 달러짜리 회사에서 연 매출 2억 달러 규모의 작은 사업부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 매출이 10억 달러 밑으로 떨어지고 심지어 8억 달러까지 곤두박질치는 상황에서 우리의 매출은 4억 달러, 5억 달러로 성장세를 이어갔다. 나는 우리가 하는 방식이 회사 전체를 위한 더 현명한 전략이었다는 평가를 받기를 내심 기대했다. 그러나 힐피거의 글로벌 수뇌부와 이사회는 모두 뉴욕에 있었다. 이들은 미국 사업에 지나치게 집중했으며 일반 주주들로부터 엄청난 압박을 받고 있었다. 그들의 관심사는 손실을 회복하고 미국 내 매출 성장을 위한 방법을 모색하는 것뿐이었다. 2003년 새로운 CEO가 들어왔다. 그는 인수합병을 통해 회사를 키우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인수합병 전략을 실행할 팀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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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그와는 다른 전략을 제시했다. 미국 내 도매유통 시장에서 잃은 입지를 되찾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모멘텀을 가지고 수익을 내고 있는 사업부에 자원을 집중하는 전략이었다. 미국 내 도매유통 채널은 축소시키고 그에 대한 관심도 줄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회사의 재무제표를 분석하고 어림잡아 계산해 본 후 얻은 결과였다. 유럽뿐만 아니라 캐나다 힐피거 사업체도 수익을 내고 있었고, 자체 제작 상품을 파는 토미힐피거의 북미 125개 아웃렛 매장도 흑자를 기록했다. 반면 미국의 백화점 사업은 거의 재앙 수준이었다. 회사가 잘나가던 시절에 책정됐던 간접비와 인수합병 작업을 진행하면서 발생한 간접비도 대부분 수익성 회복을 위해 줄일 수 있는 경비였다.

 

회생을 위한 기업 비공개

상장기업에서는 이런 반전을 꾀할 수 없다. 이것은 매우 극단적인 방법이고 급격한 매출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 주가 하락으로 주주들이 고스란히 피해를 떠안을 수 있다. 그러나 주식시장에 상장돼 있기 때문에 지출되는 비용들을 없애면 수익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상장된 기업이 법률 및 자문에 얼마나 많은 비용을 써야 하는지를 잘 알지 못한다.

 

나의 이런 비전을 이사회에 호소했다. 이사회 회장직을 맡게 된 전임 CEO는 나의 계획에 찬성했고 토미도 호의를 표했다. 하지만 현직 CEO는 반대표를 던졌고 상당수의 이사진은 중립적이었다. 나는 그전까지 이사회 임원들을 볼 기회가 별로 없었다. 반면 CEO는 그 이사회가 채용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의 주장을 이사회에 납득시키는 데 18개월을 쓸 수 있었다. 이사회는 내 계획이 너무 공격적인 구조조정이라고 걱정했다. 그럴 만했다. 그들은 나처럼 사업가적인 상식을 갖고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주주에 대한 법적인 책무를 다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듯했다.

 

이사회는 내가 제안한 전략을 추진하고 싶으면 회사 인수 제안서를 들고 다시 찾아오라고 반응했다. 그래서 나는 다양한 사모펀드회사PEF들과 접촉을 시작했다. 결국 이사회는 회사를 매각하겠다고 선언하고 인수 후보자를 받기 시작했다. 매각은 6개월이 걸렸다. 결국 에이팩스파트너스Apax Partners라는 PEF가 최종 인수자로 결정됐다. 에이팩스파트너스는 토미힐피거 브랜드가 강한 유럽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이는 문제에 봉착한 미국 시장 밖으로 눈을 돌릴 수 있는 기회도 제공했다. 2006 5월에 에이팩스파트너스로의 매각이 완료됐다.

 

우리는 과감한 구조조정에 착수했다. 미국 직원을 40%까지 감축하는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했으며 글로벌 경영팀의 대다수를 토미힐피거 글로벌 본사가 있는 암스테르담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비공개기업으로서 우리는 인위적인 단기 성과를 내기 위한 압력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다음 분기 매출보고서를 걱정하는 대신 장기적인 관점의 전략 개발과 올바른 사업구조를 만드는 데 집중할 수 있었다. 또한 메이시스Macy’s와 전략적 제휴를 맺어 토미힐피거의 미국 독점 소매 파트너업체로 만들었다. 메이시스는 이미 토미힐피거 도매 매출의 75%를 차지했지만 100% 독점권을 줌으로써 더 많은 협력을 얻어냈다.

 

단기적인 미국 사업 축소 전략은 4년이 채 되기도 전에 시장에서 토미힐피거의 브랜드가 되살아나는 초석을 마련해줬다. 컬렉션 디자인, 패션쇼 및 예술, 스포츠, 연예계 아이콘들과의 지속적인 컬래보에 투자한 결과, 해외시장에서 토미힐피거가 갖고 있던 프리미엄 브랜드의 이미지를 미국에서도 되찾을 수 있었다. 동시에 내부 자원을 균형 있게 유지해 토미힐피거의 글로벌 성장 및 사업 확장의 성장 동력을 지속시킬 수 있었다.

 

 

에이팩스파트너스와 함께 일한 시간은 경이로운 학습 체험이었다. 비상장기업 투자에서 투자회사들은 인수 회사에 지나친 영향력을 행사하고 과도한 비용 삭감을 강요하는 사례가 많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은 달랐다. 투자사는 토미힐피거가 비대하다고 생각지도 않았다. 우리가 비용절감 계획을 제시했을 때 그들은 우리의 목표치가 과하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전략이 조기에 성과를 보이자 그들은 브랜드에 지속적인 투자를 약속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미국 맨해튼에 2만 평방피트( 1850) 규모의 플래그십 스토어를 열었다. 브랜드 인지도를 강화하기 위한 마케팅 투자였다. 에이팩스는 전혀 반대 의사를 내비치지 않았다. 또한 우리는 현금 운용과 자본 운용에 대해서도 많이 배웠다. 이 두 부문에서 우리는 예전에도 잘해왔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우리는 아마추어였고 에이팩스가 많은 가르침을 줬다.

 

PEF에 대한 고정관념들 중에 한 가지는 사실이다. 그들은 언제, 어떻게 투자에서 발을 뺄까에 초점을 맞춘다.

 

성공을 위한 좋은 집

PEF에 대한 고정관념들 중에 한 가지는 사실이다. 그들은 언제, 어떻게 투자에서 발을 뺄까에 초점을 맞춘다. 회사를 인수하고 몇 달 후 구조조정이 끝나자마자 재상장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다. 기업 비공개(상장 철회) 18개월 만에 재상장을 위한 투자자 로드쇼[3]를 계획했다.

 

2008년 초 주식시장과 경제가 주춤거리자 우리는 기업공개 로드쇼를 중단했다. 몇 달 후, 리먼브러더스Lehman Brothers가 파산하고 시장이 완전히 얼어붙으면서 기업공개를 생각할 여유가 없어졌다. 당시에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식이 지배적이었지만 실제로 사업은 안정적이었다. 시장 상황이 좋아지고 다시 성장기로 돌아서면서 매출이 불붙기 시작했다. 2009년 캘빈클라인, 아이조드Izod, 반호이젠Van Heusen을 소유한 PVH에 회사를 매각하기 위한 협상이 시작됐다. 2010 5월에 매각이 성사됐다. 에이팩스가 인수한 지 4년 만의 일이다.

 

PVH에 회사를 매각한 이래로 우리의 사업은 세계 도처에서 놀라운 성과를 보였다. 플래그십 스토어는 계속 늘었고, 토미힐피거의 라이프스타일이 전 세계 도시에 퍼졌다. PVH의 자금 지원으로 마케팅과 소매유통망 개발에 투자를 늘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인도, 브라질, 러시아와 같은 주요 고성장 국가에서 토미힐피거 브랜드를 직접 소유하거나 합작 투자를 단행했다. 토미힐피거는 PVH가 신흥시장으로 확장을 지속할 수 있는 추진 동력이다. 토미힐피거의 성공 신화는 PVH의 모든 분기보고서에도 언급됐다. 지금까지 PVH의 주가가 순항할 수 있었던 것도 부분적으로는 토미힐피거 덕분이다.

 

되돌아 보니 전 세계가 하나라는 글로벌 세상에서도 시장마다 차이점이 아주 많다는 걸 깨달았다. 문화가 다르다. 미국에서 되는 일이 유럽이나 아시아에선 안 될 수도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유럽에서 큰 성공을 거두는 미국의 대형 패션 브랜드 수는 매우 적다. 마찬가지로 유럽의 패션 브랜드들도 뉴욕, 시카고, LA를 벗어나면 존재감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떤 나라에서 유효했던 전략이 다른 곳에서는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환경에 적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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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회사가 투자자(주로 금융기관)를 대상으로 벌이는 설명회역주

 

프레드 게링Fred Geh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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