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1-12월(합본호)

코브라 회장의 인도맥주 글로벌 브랜드로 키우기
카란 빌리모리아

코브라 회장의 인도맥주 글로벌 브랜드로 키우기

 

카란 빌리모리아

 

 

 

 

도 하이데라바드Hyderabad에서 살던 어린 시절, 선생님들은 내가 창의적이지 않다고 했다. 나는 그림을 잘 그리지 못했고 피아노를 칠 줄도 몰랐다. 그래서 선생님들은 나에게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했고, 나는 그 말을 그대로 따랐다. 인도의 한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뒤 런던으로 가서 언스트앤영Ernst & Young에 취직했고, 그곳에서 공인회계사 자격증을 땄다. 그러고 나서 변호사나 기업의 인수합병(M&A) 자문에 응해주는 사람이 될 생각으로 케임브리지대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잠재된 창의성이 내 안에서 터져나올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수업이 끝난 어느 저녁 전통적인 영국의 술집에 앉아서 탄산이 강한 라거를 마실지, 진한 에일을 마실지 고민하다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음식과 잘 어울리는, 특히 고향의 매운 카레와 잘 어울리는, 좀 더 균형 잡힌 맥주를 만들어 보고 싶어진 것이다. 남녀 모두가 좋아할, 언젠가는 세계시장에서 판매할 그런 맥주를.

 

그게 꿈이었는데, 이젠 현실이 됐다. 내가 우여곡절 끝에 내놓은 코브라라는 맥주 브랜드는 이제 세계 소매시장에서 연 25000만 달러를 벌어들인다. 여기까지 오는 데는 엄청난 창의력이 필요했다. 나뿐 아니라 이 사업을 일으키는 데 도움을 준 모든 사람에게 비전과 유연성, 청렴함도 요구했다. 초등학교 선생님들과 다시 연락한 적은 없지만 그들이 나를 자랑스러워했으면 좋겠다.

 

 

 

기업가정신은 나의 소명

 

회계 분야의 경력을 중단하고 법조계에서 경력 쌓기를 포기했지만 두 분야에서 내가 받은 전문적 트레이닝은 매우 중요했다. 영국의 CEO FTSE 100 지수[1]에 속한 기업의 이사회 멤버 중에는 공인회계사 출신이 특히 많다. 튼튼한 재무적 기초를 가지고 있으면 여러모로 좋다는 얘기다. 실제로 코브라의 첫 10년 동안 나는 CEO로 일하면서 동시에 재무부서도 이끌었다. 언스트앤영에서의 경험도 훌륭한 직업적 기반을 마련해줬다. 글로벌기업을 운영하는 법을 배웠고 내부에서 다양한 비즈니스를 접했다. 내 사업을 어떻게 운영할지에 대한 통찰력을 준 셈이다. 케임브리지 유니온[2]에서 토론하고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해 본 법대 학생으로서는 관계를 구축하고 열정과 이성으로 내 생각의 정당성을 입증하며 사람들의 지지를 얻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기업가정신은 내내 나의 감춰진 소명이었다. 증조부가 이 길을 갔었다. 그는 자신의 사업을 했고 세 번이나 망하면서도 결국에는 가족의 부를 쌓았다. 그러고 나서 이름난 자선사업가이자 인도의 상원의원이 됐다. 증조부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겨우 세 살이었지만 그분의 딸인 나의 고모할머니는 증조부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줬고 그의 영향은 내게 중요하게 남아 있다.

 

케임브리지의 술집에서 아이디어가 떠오른 이후 나는 그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맥주를 좋아했지만 라거는 너무 탄산이 많고 싱거우며, 배부른 느낌을 준다고 생각했다. 반면 에일은 음식과 함께 마시기에는 너무 진하고 썼다. 그 중간 정도에 있는 시원하고 청량감이 있으면서도 부드러운 맥주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매일 밤 적당한 조합을 찾기 위해 시중에서 파는 맥주들을 사다가 이리저리 섞어보는 실험을 했다. 동시에, 맥주 브랜드 론칭이 첫 벤처 창업으로는 너무 큰 야심이라는 걸 알게 됐다. 우선 사업 경험을 좀 더 쌓을 필요가 있었다. 내가 속한 케임브리지 폴로팀이 인도 전역을 다니며 경기를 하게 됐을 때 기회를 발견했다. 바로 인도에서 만든 폴로경기용 스틱을 영국에 파는 것이었다. 내가 자란 나라와 학생으로 유학을 간 나라 사이에 상거래를 트는 셈이었다. 인도는 당시 사회주의 모델을 가진 폐쇄적인 경제였지만 나는 자유화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렇게 나는 1989년 하이데라바드 시절의 친구 아르준 레디Arjun Reddy와 함께 폴로스틱 수입 사업을 시작했다. 케임브리지에서 선거에 출마하면서 알게 된 건 판매에는 지름길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세일즈를 해야 한다. 머지않아 해러즈Harrods[3]와 릴리화이트Lillywhites[4]가 고객이 됐고 우리는 가죽과 실크, 의류와 같은 전통적인 인도상품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그러다가 9개월 만에 벵갈루루에서 우연히 인도 최대의 독립맥주 브루어리를 소개받게 된다. 이 브루어리는 프라하에서 공부한 생화학자인 인도 최고의 브루마스터[5]를 고용하고 있었지만 제품을 수출한 경험은 없었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내 아이디어를 설명했다. 회사는 우선 우리가 팔스Pals와 녹아웃Knock Out 두 가지 브랜드를 영국으로 수출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하지만 팔스는 영국의 애완견 사료 브랜드와 이름이 똑같았고 권투선수의 펀치를 연상케 하는 녹아웃은 좋은 이름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회사는 우리가 자체 브랜드를 개발하는 것에 동의를 해줬다. 맛은 이미 내 머릿속에 있었다. 단지 브루마스터와 실험실에 앉아서 레시피만 정하면 될 터였다.

 

내 파트너가 런던에서 사업을 유지하는 동안 나는 인도에서 여러 달을 지냈다. 제대로 된 맥주를 만들어야만 했다. 수제 맥주가 유행하기 훨씬 전이었지만 이미 팔리고 있는 수백 가지의 맥주와 다르면서도 더 나은 우리만의 맥주를 만들어야 했다.

 

제대로 된 맥주가 나왔다는 판단이 선 뒤 나는 영국으로 돌아와 낡고 오래된 시트로앵을 타고 최고급 인도 레스토랑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레스토랑 주인들에게 우리 맥주를 소개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이 주문을 하면 다른 카레 집들도 주문을 할 테고 그러면 도매업자들도 성장 중인 이 세그먼트에 영업을 하기 위해 달려들 터였다. 1950년대 주로 주재원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던 소수의 가게들이 1990년대 초반에는 온갖 종류의 영국 소비자들을 끌어들이는 약 6000개의 레스토랑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제 영국의 카레 레스토랑은 12000곳을 넘어섰다. 첫 번째 판매분으로 우리는 한 컨테이너 분량의 맥주를 선()판매하는 데 성공했다. 절반은 레스토랑에 나머지 절반은 뉴캐슬에 있는 도매업자에게 팔았다.

 

도매 거래는 코브라라는 이름 덕분에 성사됐다. 수많은 브레인스토밍 끝에 우리는 맥주를 팬서(Panther)라고 부르기로 결정했다. 레이블 디자인도 이미 마쳤다. 맥주는 병에 넣어져 영국으로 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잠재적인 도매상들이 아르준에게 팬서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냥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2위 후보를 생각해냈다. 나는 파트너에게 “‘코브라라고 하면 살 건지 물어보라고 말했다. 도매업자들은그렇다고 답했고 나는 광고업계에 있는 내 동생에게 새로운 레이블 디자인을 부탁했다. 적응하거나 죽거나였다.

 

 

세 번의 위기 극복

 

초기에는 자금 조달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재주문이 많았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 맥주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금방 깨달았고, 자신감이 생겼다. 하지만 맥주를 더 만들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고 우리는 신생기업의 다수 지분을 포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모든 형태의 정부 지원을 활용하다가 마침내 우리의 기업 가치를 100만 파운드로 평가하고 5%의 지분을 인수한 엔젤투자자를 만났다.

 

3년이 지나면서 우리는 영업인력 몇 명을 고용했고 마케팅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인도의 지도가 그려진 전용 유리 파인트[6]잔을 만들어 레스토랑에 돌렸는데 고객들이 너무 좋아해서 집에 가져간다고 주인들이 전했다. 창업 5년차에 아르준은 인도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당시 우리의 매출은 200만 파운드였는데 그는 아마도 우리가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할 것이라고 봤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코브라와 계속 하고 싶었다. 코브라가 글로벌 브랜드가 될 수 있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에 그가 제시한 조건에 그의 지분을 사들였고 우리는 좋은 친구로 남았다.

 

기쁘게도 이듬해에 판매는 두 배로 늘었다. 이번에는 생산이 문제였다. 벵갈루루 브루어리는 수요에 대응하지 못했고 품질, 일관성, 공급량 등에 어려움이 생겼다. 생산능력을 인도에서 늘릴지, 영국에서 늘릴지를 결정해야 했다. 도매업자들의 자동적인 반응은 우리가 수입맥주로 남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설문조사 결과, 우리는 소비자들이 맥주의 원산지보다는 부드러운 맛을 더 따진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는 내게 다시금 상황에 적응할 수 있도록 자신감을 줬고 영국 베드퍼드Bedford로 생산지를 옮겼다. 생산량이 늘어남에 따라 우리는 술집과 바를 비롯한 다른 종류의 레스토랑에까지 맥주를 공급할 수 있게 됐다. 코브라를 큰 통(keg)으로 생산해 생맥주로 팔 수 있게 된 것이다. 내가 맥주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렸을 때 맥주를 마시던 바로 그 방식대로였다.

 

하지만 그때 이후 현재의 위치에 오기까지 어려움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사실 증조부의 경험을 거의 되풀이라도 하듯 나는 세 번이나 하마터면 회사를 잃을 뻔했다. 첫 번째 위기는 1998년 인도 레스토랑들의 서비스를 비판한 한 잡지 기사에 의해 촉발됐다. 기사는 내가 창간을 도왔고 발행인란에 내 이름이 올라 있는 무역잡지에 실렸다. 그래서 이 기사가 나간 후 인도 레스토랑 주인들이 1년간 코브라 맥주에 대한 불매운동을 벌였다. 그 기간 동안 우리는 영국 내 창고를 폐쇄하고 직원을 해고해야 했다. 12개월 동안 판매는 무기력하게도 겨우 3% 성장했고 나는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 열심히 일하면서 레스토랑들에게 절대 해를 끼치기를 원하지 않았다며 설득했고 그들은 결국에는 금지령을 풀었다.

 

두 번째 위기는 2008년에 찾아왔다. 이때는 코브라가 훨씬 큰 회사가 된 뒤였고 우리는 글로벌 성장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서 막대한 투자가 필요했다. 세계 최대의 주류회사 중 한 곳이 회사 지분 30% 3000만 파운드에 인수하겠다고 동의한 터였다. 하지만 주류회사 경영진이 갑자기 겁을 먹고 물러섰다. 다행히도 나는 대안을 가지고 있었다. 인도 은행으로부터 자금을 조달하는 것이었다. 리먼 브러더스가 무너지기 단 2주일 전에 우리는 대출을 받아낼 수 있었다.

 

이는 우리에게 시간을 벌어줬지만 1년도 지나지 않아 우리는 세 번째 실존적인 위협에 직면하게 됐다. 글로벌 경기침체로 인해 심한 고통을 겪은 한 투자자가 대출금 회수를 요청하고 최악의 상황에서 회사를 팔라고 요구한 것이다. 우리 회사의 가치는 한때 1억 파운드까지 갔었지만 그때는 그보다 훨씬 적게 받을 수밖에 없었다. 고통스러웠다. 2009 3월 몰슨 쿠어스Molson Coors가 합작법인에 관심을 나타냈다. 그들이 지분 50.1%를 갖고 내가 49.9%를 보유하면서 회장으로 남아 팀을 통합하는 조건이었다. 이 거래는 채권단의 90%가 좋아했지만 하나가 난색을 표했다. 이 때문에 우리는 누구나 우리 회사를 인수할 수 있는 프리-팩 어드미니스트레이션pre-pack administration[7]이라 불리는 상황에 처하게 됐다. 우리는 몰슨 쿠어스가 협상 테이블로 다시 돌아와 합작을 하도록 설득했다. 그들은 그렇게 했고, 우리는 직원 3분의 1이 합작법인으로 옮기고 중복되는 인력은 일부 남은 주주들과 함께 전액을 보상받을 수 있도록 보장함으로써 회사를 살릴 수 있었다.

 

 

 

 

성공의 핵심 요소

 

이러한 각각 의 시나리오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를 돌이켜볼 때면, 이 이야기를 시작할 때 언급했던 요소를 곱씹어본다. 첫째, 나의 회사에 대한 비전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최고의 인도맥주를 만들어 어디에서나 팔고 싶었다. 나와 우리 팀은 확고하게 코브라를 영국의 대중 브랜드로 만들었고 그러한 브랜드의 힘이 어려운 시기에 우리를 도왔다. 위기 때도 판매가 줄어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동시에, 우리는 창의적이고 유연했다. 끊임 없이 적응하고 배우며 성장하고 혁신하기를 꺼리지 않았다. 그것이 성공적인 기업가정신의 핵심이다. 가고자 하는 곳을 알고 있지만 거기까지 가는 다양한 방식에 대해서는 열린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다.

 

우리 성공의 또 다른 핵심 요소는 청렴함이다. 코브라 창업 이후 줄곧 나는 충직한 파트너와 직원, 가족에 둘러싸여 있었다. 특히, 사업을 시작한 지 1년 뒤 만난 내 아내도 그중 한 명이다. 이들은 나와 회사에 변함 없이 충실했고 이에 무한히 감사하다. 또 우리는 다 함께 항상 강한 도덕적 원칙을 고수했다. 다른 이들이 편법을 써도 우리는 그러지 않았다. 나는 옳은 일을 하면서 실패하는 것이 잘못된 일을 하면서 성공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몰슨 쿠어스 가족의 일원이 된 이후에도 나는 똑같이 비전과 창의적인 유연성, 청렴함의 불을 계속 지핀다. 코브라는 지난 몇 년 동안 몬데 셀렉션Monde Selection경연대회에서 101개의 금메달을 수상했으며 우리는 이제 일본과 캐나다, 호주와 함께 거의 모든 유럽연합(EU) 국가에 수출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앤호이저 부시Anheuser-Busch가 킹코브라King Cobra브랜드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상표권 제한과 씨름을 해왔다.

 

큰 기업은 관료주의적일 수 있지만 나는 여전히 혁신과 적응, 빠른 속도를 추구한다. 2018년 우리는 블론드 IPA[8]인 코브라 말라바Cobra Malabar를 출시했다. 복잡한 상면발효 레시피에서 나왔으며 제대로 만들어 내놓는 데 2년이나 걸렸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에는 해냈다. 이제 코브라는 재무과 마케팅, 유통을 포함하는 몰슨 쿠어스의 전체 방식을 등에 업고 있다.

 

나는 계속해서 회사 전반에 걸쳐 강한 신뢰관계를 쌓는 데 주력하고 있다. 코브라 창업 초기에 나는 아르준과 함께 생산 준비에서부터 레스토랑과의 협상, 직원 고용까지 모든 일을 해본 덕분에 미국-캐나다-영국-인도 사업장의 어디를 가도 직원들이 뭘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임원진 중에는 피트 쿠어스Pete Coors와 몰슨 가족, 글로벌과 영국의 고위경영진을 개인적으로 알게 됐다. 이렇게 큰 조직에서 임직원이 들고 나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코브라 창업 초기와 같은 충성심을 기르지 못하란 법이나, 항상 함께 옳은 일을 하도록 애쓰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지난 15년 동안 나는 영국의 비즈니스 및 정치 공동체에도 폭넓게 관여해 왔다. 그레이터 런던[9]의 부지사를 지냈고 2006년에는 상원의 무소속 당대 귀족[10]에 임명됐다. 나의 사업 경험과 접근방식을 이런 역할에 적용해 보려 노력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지난 몇 년 동안 브렉시트Brexit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높여왔다. 이 일이 코브라와 영국에 기반을 둔 기업뿐 아니라 미래 세대의 시민들에게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위험을 무릅썼다. 우리는 유럽 연합에 남는 것이 이득이다. 이는 음악과 예술의 세계 밖에서 비전과 창의력, 청렴함을 필요로 하는 또 하나의 상황이다. 하지만 나와 나의 팀, 나의 제2의 조국은 잘 헤쳐나갈 것이라고 믿는다.

 

 

 

번역 김선우 에디팅 장재웅

 

 

 

[1] The Financial Times Stock Exchange 100 Index. 런던증권거래소에 상장돼 있는 주식 중 시가총액 상위 100개 기업의 주가를 지수화한 종합주가지수로 영국 주식시장의 대표 지수

 

[2] 케임브리지대의 학생 토론클럽

 

[3] 영국을 대표하는 백화점

 

[4] 영국의 스포츠용품 유통업체

 

[5] 맥주 양조기술자

 

[6] Pint. 영국에서 1파인트는 0.568L

 

[7] 파산 관련 절차 중 하나로 퍼실리테이터가 지정되기 전에 기업이 자산의 전체 또는 일부를 매각하는 것을 말한다.

 

[8] India Pale Ale. 19세기 영국에서 인도에 수출하기 위해 처음 양조된 에일맥주로 변질을 방지하기 위해 홉을 많이 넣어 쓴맛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9] Greater London. 런던을 포함하는 잉글랜드의 최상위 행정구역으로 시티 오브 런던(City of London) 32개의 런던 자치구(London boroughs)가 속해 있다.

 

[10] 영국에서 귀족 칭호는 받았으나 그 작위를 자식에게 물려줄 수는 없는 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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