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BR in DBR (~2013)

미군의 빛나는 名將들은 어디갔나?
토마스E.릭(Thomas E. Ric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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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이 글은 <하버드비즈니스리뷰(HBR)> 2012 10월 호에 실린 토마스 E. 릭의 글 ‘What ever happened to accountability?’를 전문 번역한 것입니다.

 

조직 외부에서 경영에 대한 교훈을 찾는다면 미군 사례만한 것이 없다. 경영학 구루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는 특히 리더십에 대해 미군을 자주 예로 들었다. 예컨대 1967년 출판된 <자기 경영노트(The Effective Executive)>에서 제시한 조언을 보자.

 

“우수한 성과 달성에 지속적으로 실패하는 조직원들을 가차 없이 내보낼 악역은 경영자의 의무다. 성과 나쁜 관리자는 특히 그렇다. 그들을 그냥 두는 것은 전체 조직을 상하게 하는 일이다. 이는 전체 조직에 대단히 불공평하다. 충분한 성취와 인정의 기회를 얻지 못한 그 아래 조직원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관리자 스스로에게 의미 없이 잔인한 일이다. 스스로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그들은 자신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피터 드러커가 현명한 방식이라고 언급한 첫 번째 예는 1960년 비즈니스 업계 사례가 아니었다. 1940년대의 미국 육군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당시 리더였던 조지 마셜(George G. Marshall) 장군이 성과가 저조한 리더들을 즉시 내보낼 것을 종용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드러커가 책을 집필할 당시 육군은 마셜 장군이 그토록 강조했던 신속한 해고의 규칙을 잊고 인재 관리 면에서 다른 종류의 교훈을 얻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부터 베트남전에 이르기까지 근 20년간 미 육군에 일어난 변화를 살펴보고 높은 기준과 신뢰의 문화가 어떻게 변질돼 가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이후 60년 역사를 통해 그보다 더 깊은 차원의 도덕적 문제를 살펴볼 것이다. 철저히 지켜지지 못한 기준과 불충분한 성과에도 변화가 없는 리더십은 기업의 일부 기능을 망가뜨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는 스스로의 기준을 잃어버리게 하고 리더십의 가장 중요한 역량을 위축시킨다.

 

적재적소에 배치된 인재

마셜 장군 시절에는 아마도 군대 리더십 성공에 기여하는 요인을 정의하는 일이 좀 더 쉬웠을 것이다. 목표를 추진하는 어떤 리더의 방식이 다른 이들의 것보다 더 효과적인지 평가하는 일이 좀 더 직관적이었을 수도 있다. 그것은 마셜처럼 특징이 없어 보일 정도로 과묵하고 절제하는 성격인 사람을 장군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그는 조직이나 기업의 방향을 정하고 활력을 불어넣는해결사적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늘 변화하는 리더의 전형이었다.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던 1939 91일 그가 보여줬던 절제된 행동을 생각해보라. 그날 그는 육군 참모총장으로 공식 승진했다. 당시 육군은 공군을 포함했기 때문에 지금보다 훨씬 중요한 자리였다. “그날 아침 온 세계가 충격에 빠진 것 같았습니다.” 조지 패톤(George Patton)의 아내에게 보낸 메모에서 그는 풍자적으로 얘기했다. 종전 후 또는 눈에 띄는 성공 후에도 그는 많지 않은 연금으로 생활했다. 여러 출판사에서 쏟아지는 거액의 출판 제의도 모두 거절했다.

 

확실히 조지 마셜은 타고난 정치가나 정부 관료 타입은 아니었다. 그의 부하인 알버트 웨데마이어(Albert Wedemeyer) 장군은 그를쌀쌀맞고 인간미 없는 사람으로 기억했다. 그는 당시 총사령관이었던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Roosevelt) 대통령에게조차 거리를 두고 지냈다. 대통령의 유머에 웃지 않았고 성을 뺀 이름만으로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하이드파크에 있는 루즈벨트 자택에 처음 방문한 것은 루즈벨트 대통령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활약보다는 이후 유럽 경제를 부활시킨 마셜 플랜(Marshall Plan)으로 더 많이 기억된다. 하지만 그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확신을 갖고 맹렬하게 추진했다. 그는 매력이나 카리스마가 아닌 명확한 기준으로 조직을 이끈 대표적인 인물로 평가된다.

 

마셜 이후에는 최강 국력 확보나 전 세계를 무대로 하는 기계화된 부대 등 그가 진행했던 대대적인 개혁이 좀처럼 없었다. 1939년 그가 참모총장이 되던 날, 미군은 19만 명 규모의 약체였다. 그는 공식 국방부 보고서에 ‘3급 군력이라고 보기도 어려울 정도라고 적었다. 9개의 보병 부대 가운데 3부대만 사단이었고 나머지 6부대는 약한 여단에 불과했다. 6년이 지나고 그가 자리에서 물러날 때는 군인 숫자가 800만 명에 육박했다. 유럽 전역에 40개의 사단이, 태평양에 21개 사단이 위치했다.

 

변화하는 리더가 흔히 그렇듯 마셜도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에서 출발했다. 그는 각 사람에게 꼭 맞는 일을 맡겼다. 잘못 배치된 사람을 제거하는 일에 거침이 없었다. 준장이었던 찰스 분델(Charles Bundel) 3∼4개월 안에 군 교육 매뉴얼을 업데이트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며 18개월을 요구하자 마셜은 다시 생각해보라고 두 번이나 요청했다. 분델이절대 불가능합니다라고 답하자미안하네, 자넨 이제 손떼게라고 답했다.

 

1939년 봄, 참모총장이 되기 전부터 마셜은 쓸모없는 고목이라고 생각해왔던 여러 장군을 내보낼 계획을 갖고 있었다. 1941년 겨울, 미국이 참전하기 전까지 어림잡아 600명에 달하는 장군들이 옷을 벗었다. 진주만 공격 바로 직후에는 태평양 지역의 육··공군 최고위 군인들을 면직시켜 파장이 일기도 했다. 1년 후 일본 전쟁 부대 중 하나의 사령관도 자리를 잃었다. 아프리카에서 독일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던 부대의 고위 전략 사령관도 마찬가지였다.

 

그 자리는 드웨이트 아이젠하우어(Dwight D. Eisenhower)처럼 혈기왕성하고 젊은 장교로 채워졌다. 그는 1940년 중령으로 한 보병 연대에서 수석 관리자 역할을 맡고 있었는데 마셜은 이처럼 새로 발굴한 인물들을 다방면으로 테스트했다. 각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바로 제외했다. 처음에는 한 그룹을 이끌도록 했다. 다음은 훈련된 조직을 이끌고 바다 건너 실제 전투에 투입되도록 했다. 실전에 투입되는 사령관들은 몇 달 안에 전쟁에서 이길 수도, 혹은 죽거나 다쳐 밀려날 수도 있었다. 155명이 전쟁에 참여하도록 허가를 받았고 이 중 16명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마셜의 신속한 인사 배치에도 너그러운 구석이 하나 있기는 했다. 그는 자리에서 물러난 사람들을 곧바로 해고하지는 않았다. 자리에서 내려온 사령관 중 5명은 이후 다른 부대를 이끌도록 배치됐다.

 

마셜의 방식은 역동적이면서도 고집스러운 인사관리 시스템이었다. 그리고 효과적이었다. 육군에 탁월함이란 곧 적응력이다. 변하는 환경을 장악하고 그에 맞게 결정을 내리는 것이 중요하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아군과 적군 모두 발견한 미군의 독특한 특징은 필요한 것들을 빨리 간파해 배웠다는 것이다. 중앙아시아의 영향력 있는 역사학자인 버나드 루이스(Bernard Lewis) 2007년 저서인에서 영국 군대에서 정보 장교로 지냈던 시절에 발견한 미국인의 두 가지 특징을 언급했다. “첫째는 그들을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이다. 더욱 참신했던 것은 그들이 스스로 실수를 인정하고 분석한 뒤 그것을 바로잡는 속도다. 이는 내가 발견한 두 번째 특징이기도 하다. 이것은 우리가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잘 알려진 독일 사령관 필드 마셜 어윈 로멀(Field Marshal Erwin Rommel) 역시미국인이 스스로를 진화시키는 속도는 정말 대단하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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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계획을 지금의 리더와는 실행할 수 없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고작 5년 후, 미군은 한국전쟁에 참여했다. 그런데 그들은 적응력을 잃어버린 듯했다. 1950년 나치와 일본 제국에 맞섰던 그들은 한반도에서 볼품없이 무장한 소작농 부대를 이끌어야 했다. 그해 여름 북한군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남한군이었다. 그해 가을에 그들은 중공군 규모에 놀라기도 했다.

 

중장이었던 매튜 리드웨이(Matthew Ridgway)는 마셜의 또 다른 후계자였다. 그는 전세를 뒤집는다는 목표 아래 1950년 말 파견됐다. 한국에서 맞는 첫 아침, 날카로운 눈매의 리드웨이는 폭격기 B-17에 올라타고 주변을 돌면서 한반도의 구불구불한 지형에 적응해갔다. 그날 그는 한국 대통령을 방문했다. 그리고 이후 사흘의 대부분을 전장의 사령관들을 찾아다니는 데 썼다. 그는 미국 군사 리더들의 리더십과 도덕성이 엉망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령관들은 전투 중인 지역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그들은 군사를 산등성이에 배치하지 않고 길에 세워두고 있었다. 주변의 다른 부대와의 협공 작전도 형편없었다. 리드웨이는 1990년 발간된 <밀리터리 리뷰(Military Review)>에서사병들은 혼란스러워했다. 전술도 전략도 모두 엉망이었다고 적었다.

 

탁월함으로 칭송받던 사령관들이 왜 이렇게 빨리 평범하게 변해버린 걸까? 이는 명확한 목표에 대한 집중과 목표를 추구하는 최적의 인물이 사라지고 리더십을 평가하는 기준들이 다른 조건으로 훼손됐다는 점을 보여준다. 원인의 하나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참모 역할에 머물렀던 장교들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려고 했다는 점이다. 소비에트연방(Soviet Union)과 전쟁이 일어났을 때 투입할 수 있는 장교들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리드웨이는 단호하게 처신했다. 군 수령부가 최전선에서 180마일이나 떨어져 있다는 점을 발견하고 가까운 곳으로 옮기도록 명령했다. 일부 상급 지휘관은 물러나게 했다. 그는 참모군 수령에게내가 생각하는 작전을 지금의 리더들과는 추진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그는 이후 3개월에 걸쳐 군단장 1명과 사단장 6명 중 5, 19명의 연대장 중 14명을 물러나게 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리드웨이는 곧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는 변화하는 리더십의 좋은 예다.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작고 잘 알려지지 않은 전쟁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점에서 더 유명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드웨이는 스스로 원했던 만큼 마셜의 장교 관리 체계를 완벽히 지키지는 못했다. 2차 세계대전에서 그랬던 것처럼 고위 사령관을 면직시키는 행위에정치적 개입을 피할 수는 없었다. 전쟁의 정치적 성향이 원인의 일부로 작용했다. 리드웨이가 처음으로 사령관 한 명을 내보냈을 때 국방부 내에는 긴장감이 흘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상급 장군은고위 사령관을 많이 내보내면 의회 조사를 받을 수 있다는 전보를 리드웨이에게 보냈다. 리드웨이는 속도를 늦출 것, 면직 조치가 통상적인 인사 과정의 일부로 보이게 할 것 등의 지시를 받았다. 이것이 미 장군들의 몰락과 신뢰도 하락의 전조가 되리라는 것을 당시에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조직적인 사리사욕으로의 추락

한국전쟁을 승리로 이끌 리더 선정 과정이 정치적 요소로 훼손됐다면 베트남전에서는 정반대였다. 한국전 이후 육군 조직은 표류했다. 핵무기 시대에 지상군의 역할은 무엇인지에 심각한 질문이 오갔다. 핵무기의 등장은 공군과 해군에 대혁신을 가져왔다. 공군은 매우 빠르게 팽창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첫 번째 대륙 간 폭격기인 B-52가 등장했다. 우주로 정찰 위성이 쏘아 올려지기도 했다. 해군 역시 핵 동력 잠수함 USS 노틸러스(Nautilus)를 도입하고 중거리 핵탄두 미사일 폴라리스(Polaris)를 개발했다. 1959년 육군에 할당된 국방부 예산은 전체의 23%로 공군에 배정된 금액의 정확히 절반이었다.

 

스스로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육군은 재빨리 새로운 역할을 찾아냈다. 공군과 해군이 핵전쟁에 집중하며 초고가 전쟁 기술 개발에 열을 올릴 때 육군은 그 반대, 즉 전통적으로 해병대가 맡아왔던 저가 기술 쪽으로 움직이려고 했다. 1950년 하반기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맥스웰 테일러(Maxwell Taylor) 장군은국지전에 주력했다. 소규모 전투를 집중적으로 준비하기 위해 노스캐롤라이나의 포트 브래그(Fort Bragg) 지역에특수 전투 학교를 세웠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사회주의 체제의 외딴 지역에서 벌어지는 충돌에 휘말리는 것을 강하게 거부했다. 1956년 그는우리는 비교적 덜 중요한 지역에 병력을 파견하거나 주둔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뒤를 이은 대통령, F. 케네디는 테일러 장군의 아이디어에 흥미를 느꼈고 그를 백악관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그에게 점점 더 나빠지는 베트남 남부 상황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고민하도록 했다. 새롭고 익숙하지 않은 시장으로의 진출에 앞서 충분히 조사한 사례를 꼽으라면 이 건이 해당될 것이다. 특히 군대는 파견되는 곳의 특수 상황에 잘 맞추지 못한다. 1950년 전장에서의 절박한 모험은 육군이 스스로의 역할을 찾기 위해 시도한 노력 중 하나였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가장 위대한 세대로 추앙받는 동시에 베트남에서 크게 실패한 악마로 묘사되기도 한다는 - 마땅히 그래야 하기는 하지만 - 사실은 매우 놀랍다. 그들은 단순한 생존자가 아니다. 20대와 30대 초반을 2차 세계대전에서 보낸 승리자며 대대와 연대의 수령이다. 수백만 군인 중에서 뛰어난 기량을 발휘했으며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당당하게 우뚝 섰다. 군을 이끌 지도자로 적합했는지는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대 사령관들은 테일러(Taylor) 지휘 아래 있었다. 그는 2차 세계대전에서 101번째 에어본(Airborne) 부대를 이끌었던 사람이다. 은퇴 후에도 케네디가 군 고문으로 임명했고 1962년에는 합동참모본부의 리더로 현업에 복귀했다. 테일러는 마셜과 정반대 유형의 사람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셜이 백악관과 거리를 유지하려고 할 때 테일러는 그곳을 오히려 자기 권력의 원천으로 삼았다. 마셜이 대통령에게 솔직 담백한 태도로 일관한 것과 달리 테일러는 종종 거짓으로 행동했다. 그는 장군들과 참모 본부 내 소외된 멤버들 사이의 불신을 이용했다. 현저하게 모자라는 사람들을 뽑아 베트남전을 지휘하도록 하기도 했다. 첫 번째는 폴 하킨스(Paul Harkins)였고 두 번째는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William Westmoreland)였다.

 

마셜의 전투 지휘 시스템은 베트남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정직과 신뢰는 속임수와 명령 불복종으로 바뀌었다. 2차 세계대전에서의 적응력으로 칭송받던 군은 괴로울 정도로 천천히 그들이 속한 전쟁의 성격을 깨달았다. 미군은 화염무기 사용에 훨씬 신중했어야 했다. 그것은 마지막 수단이었다. 계획했던 대로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시스템 자체가 문제였다. 베트남에서는 자리를 박탈당한 장군이 거의 없었다. 피터 드러커가 이 상황을 자세히 들여다봤다면 전체 조직에 극도로 불공평하다고 지적했을 것이다.

 

부적합한 사람들을 내보내지 않은 것은 또 다른 문제들의 원인이 됐다. 진정한 성과가 인정받지 못하고 실패한 자가 보상받는 문제가 지속되면서 위험을 감수할 유인이 전체적으로 약해졌다. 군사학을 연구하는 학생이자 사령관이었으며 지금은 랜드 코퍼레이션(RAND Corporation)의 수석 정치과학자인 웨이드 마르켈(Wade Markel)은 이를 두고 한때 기회를 찾으려고 열심히 노력했던 한 군대가 지금은 단지 잘못을 피하기 위해 일하고 있는 꼴이라고 비유했다. 대부분 총격전은 적군에 의해 시작됐고 그들을 뒤쫓기란 쉽지 않았다. 퇴역 중장인 데이브 리처드 팔머(Dave Richard Palmer)는 베트남전 운영 보고서인트럼펫의 소환(Summons of the Trumpet)’에서추격의 예술은 잊혀졌다. 대규모 공산군이 쫓기거나 토벌된 적이 없었다라고 말했다.

 

자질이 부족한 리더들이 자리를 지키면서 이들의 상관은 임무를 완수하기 위한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베트남전을 치르는 군에서는 오늘날 우리가미시 경영(micromanagement)’이라고 부르는 밀착 관리 방식이 흔했다. 작은 군부대의 수장이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전선과 참여한 여단, 심지어 헬기를 타고 군대 위를 날아다니는 사단장 등을 살피느라 정신없는 모습을 담은 사진들은 우연히 찍힌 것이 아니다.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에 참여한 장군 프레드릭 크로이슨(Frederick Kroesen) 2010 <군대(Army)>라는 잡지에상급 사령관들은 헬기를 타고 다니며 정보를 모으고 지시하고 분대장과 소대장, 중대장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간섭하고 다녔다라고 적기도 했다. 이 같은 행동은 전쟁의 효율성을 떨어뜨렸을 뿐 아니라 리더들이 압박받는 상황에서 판단하게 만들어서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았다.

 

군 조직에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초점이 잘못 맞춰지면서 신뢰에 흠이 나기 시작했고 이는 현재 중대에 도움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집중력 훼손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중요하지만 잘 언급되지는 않는 미라이(My Lai) 사건이 주는 교훈이기도 하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 대학살 사건을 1968 316일 얼빠진 중위가 악당 같은 소대를 이끌고 저지른 끔찍한 결과로만 기억한다. 400명의 베트남 소작농이 죽었고 그중 120명은 5세 이하의 어린이였다. 여기서 간과되는 것은 스스로 완벽하다고 여기는 군의 차후 조사에서 이 참혹 행위와 은폐 과정에 사단장 사무엘 코스터(Samuel Koster)까지 이어지는 명령 체계가 발견됐다는 점이다. 작전상 헬기를 타고 날아다닌 군 사령관들이 임무를 수행했다. 여단 사령관 코로널 오란 헨더슨(Colonel Oran Henderson)은 미라이에서 120명의 베트콩 군인들이 사망했다고 거짓 보고했다.

 

이 사실은 한 전직 사병 군인이 민간 장교로부터 그날 자행된 살해와 강간을 듣고 밝히기 전까지 1년이 넘도록 은폐됐다. 당시 육군 참모 총장으로 승진한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은 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전문가이자 베트남에서 보병 제4연대를 이끈 중위 장군 윌리엄 피어스(William Peers)에게 조사를 지시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죄들이 공소시효 만료를 눈앞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엄청난 부담을 느꼈다. 피어스와 그의 부하들은 400번 넘게 인터뷰를 했다. 피어스는 코스터의 오랜 친구였지만 사단장으로서 그의 증언은 거의 믿을 수가 없었다. 피어스는 코스터가 행한 조직적인 거짓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중대장부터 사단장에 이르기까지 각 조직의 수장들이 사실을 숨기고 정보를 은폐하는 데 가담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거짓 행위들이 너무나 철저해서 피어스는 그가 평생 몸 바친 군대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를 고민하게 했다. 수많은 사령관이 미라이에서 일어난 끔찍한 일을 알고 있었지만 용기를 내서 세상에 그 사실을 알린 사람은 사병 군인이었다. 피어스의 공식 보고서에는 문서의 대량 폐기를 포함해 사건 은폐에 가담한 군인 30명의 이름이 포함됐다. 여기엔 2명의 장군과 3명의 대령도 들어갔다. 코스터에게는 음모와 허위 진술, 직무 유기에 대한 죄가 부과됐다.

 

육군 지도자들은 충격적인 사실에 직접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피했다. 코스터의 재배치를 결정하는 임무를 맡은 조너선 시만(Jonathan Seaman) 중령은 코스터를 군법회의에 회부하는 대신 최대한 경미한 처벌만 내렸다. 중령으로의 강등과 징계 문서가 전부였다. 베네딕트 아놀드(Benedict Arnold) 이후 코스터는 어느 장군보다도 육군에 큰 불명예를 안긴 사람이었지만 1973 11일까지 군 잔류가 허용됐다. 피어스는 이를 두고 웨스트모어랜드에게 “정의의 졸렬한 모방이라고 비아냥거렸다.

 

만일 미라이 사건을 육군이 내려갈 수 있는 바닥이라고 한다면 이 사건에 연루된 리더들에게 내려진 가벼운 처벌은 육군 지도자 문화의 최저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조지 마셜이 보였던 엄격한 신뢰성이나 그가 미국 국민에게 느꼈던 책임감과 극명히 비교된다. 당시 육군은 인종 간 갈등으로 분열된 계급 체계와 약물 남용, 해이해진 기강으로 얼룩져 있었다. 민간 감독기관들은 물론 미국 국민에게 아무 신뢰를 얻지 못했다. 온갖 문제에도 군에 남아 4성 장군 자리까지 오른 배리 맥카프리(Barry McCaffrey)당시 육군은 붕괴 직전이었다고 회고한다. 베트남전 시절의 장군들이 전문적인 리더의 모습을 잃고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는 구멍가게 대장과 비슷하게 변한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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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함의 대가

자신의 위치를 사수하는 데만 관심이 있을 뿐 진실성이 없는 리더가 주도하는 프로세스 결과는 가끔 발생하는 형편없는 성과에 비해 훨씬 저조하다. 시스템 전반에 미치는 리더십 능력도 위축되기 시작한다. 리더들에게는어떻게할 것인가에 대한 전술뿐 아니라무엇을할 것인가에 대한 고차원적 전략이 요구된다. 육군이 기준을 엄격히 지켜내지 못하자 상위 리더들이 전략적으로 사고하지 못했고 이는 이라크전과 아프가니스탄전에서 명백히 드러났다.

 

1970년과 1980년 육군은 대대적인 정비에 나섰다.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바꿨고 훈련과 무기를 혁신했으며 어떻게 싸울 것인가에 대한 원칙도 개편했다. 당시는 물론 지금도 별로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이 같은 정비가 오직 한 단계에서만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리더들은 임무를 완수하기 위한 전술을 가르치는 데만 집중했을 뿐 전략적 사고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은 전투에서의 승리와 그보다 훨씬 어려운 전쟁에서의 승리 사이의 차이를 알지 못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은 장대한 전투를 치렀다. 잘 훈련됐고 좋은 장비를 가졌으며 결속력 강한 조직이었다. 결속력은 상대적으로 작은 군대가 기나긴 전쟁에서 무너지지 않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하지만 새로운 몸을 가졌을지언정 머리는 예전 그대로였다. 조직을 이끈 것은 눈앞의 과제에 놀랄 만큼 준비가 안 돼 있던 리더들이었다. 특히 중요한 임무일수록 더 그랬다. 1989년 파나마전, 1991년과 2003년 이라크전, 2001년 아프가니스탄전 등 4차례나 육군 장군들은 첫 승리를 지키기 위해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고 서둘러 적군을 공격했다. 사실 그들은 그 질문에 고민하는 것은 그들의 몫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코로넬 수잰 넬슨(Colonel Suzanne Nielsen) 중령은 2010년 미 육군 대학원의 한 평가에서육군은 전술과 운영 면에서는 뛰어났을지 모르나 정치 지도자들을 도와 전략적 성공을 얻어낼 만한 리더를 발굴하는 데 실패했다고 기록했다. 결과적으로 육군은 전선에서의 리더십(참모를 갖는 첫 단계)과 전투 능력을 헷갈렸던 셈이다.

 

육군은 베트남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책임 있는 사령관을 세우는 데 실패했다. 코로넬 폴 잉링(Coronel Paul Yinling) 중령은에서전쟁에서 진 군인보다 소총을 잃어버린 군인이 더 많이 질책을 받았다고 비난했다. 최고 장군들이 자리를 잃기는 했다. 베트남전의 하킨스와 웨스트모어랜드는 밀려났고 이라크전에서 조지 캐시(George Casey) 장군은 사령관에서 강등됐다가 떠날 것을 요구받았다. 아프가니스탄전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데이비드 맥커난(David Mckiernan) 장군과 스탠리 맥크리스탈(Stanley McChrystal) 장군을 해고했다. 하지만 이는 예외적인 사건에 불과했고 매우 간단한 법칙에 따라 발생했다. 전쟁에 지친 시민들이 요구할 때만 일어났던 것이다. 군 조직 내에서 사단을 지휘하는 장군들은 자리를 유지했다. 더구나 전쟁 중인데 최고 장군을 갈아 치우는 식은 훌륭한 관리라고 볼 수도 없다.

 

갈아 치우기

지금까지 살펴본 역사적 사실은 군 리더십은 물론 비즈니스 세계에도 명확한 시사점을 지닌다.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셤의 법칙(Gresham’s Law)은 여전히 작동한다. 이 법칙에 들어맞는 인물이나 평범함은 빠르게 관행으로 자리 잡는다. 적응력을 되찾고 전투 효율을 높이려면 육군은 신뢰를 쌓아야 한다. 모든 장군은 스스로를 엄격하게 돌아봐야 할 것이다. 성공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돕는 리더들은 더 높은 곳으로 올라야 하며 어려운 도전에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판명된 사람들은 비키게 해야 한다(다른 상황에서 한번 더 기회를 주는 방법이 있을지 모르겠다). 다른 사람이 그 일을 이어받아야 한다. 무능함이 다른 사람의 생명을 잃게 할 수도 있는 군대에서는 자질이 부족한 리더들이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된다.

 

탁월한 인재 관리는 어느 조직에서나 필수다. 미군 조직을 거울삼는다면 비즈니스 리더들도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육군은 잘 훈련되고 강한 동기를 지녔으며 다양한 실무진을 길러내는 방법을 알고 있다. 비즈니스 리더들은 육군 사례가 보여주는 리더십과 전략 부문의 교훈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한 기업의 미션이 가장 중요한 곳에 명확히 자리 잡고 있다면 리더들의 실적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개인이 보다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은, 드러커의 말을 빌리면 가차 없는 행동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잔혹함과는 정반대다.

 

번역 |최두리 dearduri@gmail.com

 

토마스 E.

토마스 E. (Thomas E. Ricks)은 이라크전에 대한와을 포함해 미군에 대한 다섯 권의 책을 저술했다. 최근에는를 저술했다.

 
※ <HBR in DBR>에 소개된 기사는 HBR Korea 창간(2014년 03월) 이전에 DBR에 소개되었던 번역 기사로 HBR Korea에게 다운로드 관련 저작권이 없습니다. PDF다운로드가 불가하오니 이 점 양해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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