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3월호

제2의 파괴
조슈아 건즈(Joshua Gans)

2의 파괴, The Other Disruotion

 

혁신이 조직 모델을 위협하고 있다

 

조슈아 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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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ea in Brief

 

문제점

파괴적 혁신에 대처하는 전략방안에서는 기업들이 별도의 사업부문을 조직해 경쟁기술을 개발하도록 촉구한다. 하지만 실상에서 기업들은 새로운 혁신과 역량을 영업활동의 주류로 편입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으며 고군분투하고 있다.

 

발생 요인

많은 파괴는 제품의 기본 아키텍처, 즉 제품의 조합방식에 변화를 초래한다. 이러한 상황에 적응하려면 직무와 기능을 넘나드는 깊이 있는 조직적 통합이 필요하다. 하지만 대부분 대기업은 제품 구성요소를 중심으로 연구개발 조직과 운영 조직을 구성한다.

 

해결책

제품 아키텍처에 초래된 변화를 견뎌내고 살아남은 기존 기업들은 대체로 다음의 세 가지 핵심 요소에서 자사의 성공요인을 꼽는다. 통합된 조직모델, 최종고객이 중시하는 특징 소유, 강력한 기업정체성이 그것이다.

 

클레이턴 크리스텐슨Clayton Christensen 1997년에 <혁신기업의 딜레마The Innovator’s Dilemma>를 발표한 후로 경영학자들은 고객의 수요패턴을 파괴하는 혁신에 주목해 왔다. 그 진행과정은 보통 이렇다. 신규진입 기업이 혁신제품을 개발한다. 그런데 이 혁신제품은 초반엔 틈새고객 세그먼트에서만 인기를 끌고, 기존 측정기준으로 볼 때 주류제품보다 성능이 뒤떨어진다. 처음에 고객은 혁신을 거부하지만 고객이 원하는 성능 개선이 빠르게 이뤄지면서 고객은 혁신을 점차 수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렇게 해서 신규진입 기업은 실제로 기존 기업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존재로 자리매김한다.

 

지난 20년 동안 경영진들은 이러한수요 측면의 파괴적 혁신에 대응하는 방어책을 마련해 왔다. 가장 흔한 방법으로는 파괴적 혁신을 일으키는 신규 기업을 합병하든지, 혹은 잠재적 파괴적 혁신을 탐색할 별도 사업부문을 만드는 방식으로자발적 파괴를 추진하는 일일 것이다. 기본 아이디어는 파괴적 혁신이 산업을 점차 장악해가면 기존 기업도 신기술을 통한 주요 먹거리를 개발해 스스로 체질개선에 나설 차비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론보다 실행은 어려운 법이다. 많은 경우에 파괴적 혁신에 뛰어든 기존 기업은 신기술을 자사 영업활동의 주류로 편입시키는 게 불가능한 상황에 직면한다. 제품 생산과 유통방식을 근본부터 뜯어고쳐야 하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제품의 기본 아키텍처architecture, 즉 제품의 조합방식이 고객 기대와 선호도에 따라 변하다 보면공급 측면의 파괴도 더불어 일어나게 마련이다.

 

2007년 당시 아이폰이 블랙베리에 도전장을 내밀었던 상황을 보라. 처음에 아이폰은 전화 통화 품질과 배터리 수명, 네트워크 사용량 등 어느모로 보나 블랙베리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아이폰은 블랙베리 사용자가 애지중지 여기던 키보드마저 제공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폰이 내놓은 혁신적 디자인은 미래 디자인의 전형이었다. 고객들은 아이폰 디자인에 푹 빠져들었다. 블랙베리와 더불어 경쟁사들은 재빨리 궤도를 수정했다. 그들은 터치스크린과 우수한 성능의 브라우저 등 아이폰이 탑재한 기능을 자사에도 적용했다. 하지만 이들은 애당초 효과적으로 경쟁할 수 없었다. 혁신에는 휴대전화 제조 전 과정에 걸친 재설계가 뒤따랐기 때문이다. 오직 삼성과 같은 신규진입자, 즉 기존 생산 모델에 고착되지 않아 신제품 아키텍처에 적합한 방식으로 조직을 좀 더 수월하게 조정해 갈 수 있었던 기업들만 아이폰에 제대로 맞설 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덜 통용되는 사실이긴 하지만, 주장컨대 공급 측면의 파괴는 크리스텐슨이 이야기하는 수요 측면의 파괴보다 기업에 훨씬 더 위험하다. 실제로 제품의 아키텍처가 파괴되면 고객 수요 측면의 변화와는 달리 기업의 생존 자체가 위협을 받기 때문이다. 다행스러운 사실은, 제품 아키텍처를 뒤집고 조직구조 역시 뒤바꾼다면 기업이 반드시 망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아키텍처의 파괴architectural disruptions가 지속되는 와중에도 기존 기업은 생존할 수 있을뿐더러, 심지어 전보다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다. 레베카 헨더슨Rebecca Henderson과 메리 트립사스Mary Tripsas를 포함한 여러 전문가들의 연구와 혁신에 직면한 기업에 대한 필자의 연구를 토대로, 필자는 기업이 장기 생존을 위해 취할 수 있는 세 가지 대처방안을 알아봤다. 이른바 통합된 조직모델, 최종고객이 중시하는 특징 소유, 강력한 기업정체성이 그것이다. 다음에서 그 안을 하나씩 살펴보겠다.

 

통합 모델의 가치

 

아키텍처의 파괴가 일어나는 동안 살아남는 첫 번째 방안은 조직통합 모델을 구축하는 일이다. 이 모델은 경영학자인 레베카 헨더슨의 연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헨더슨은 1987년부터 1988년까지 혁신이 사진석판산업에 미치는 영향에 관해 자료를 수집하고 인터뷰를 실시했다. 사진석판술은 인쇄회로기판(PCB)과 마이크로프로세서를 만드는 표준기법이다. 헨더슨에 따르면 사진석판산업은 얼라이너 기술aligner technology이 점진적 혁신을 거듭하는 동안 네 단계에 걸쳐 파괴적 혁신도 더불어 겪었다. 이 네 차례 혁신은 시장가격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가격은 안정적으로 유지됐는데, 이는 파괴자가 저가시장에 진입해 산업 전반에 걸쳐 가격하락 압력을 가하는 크리스텐슨의 사례와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오히려 이 네 가지 단계는 얼라이너의 조립과 제조 방식을 변경해 아키텍처의 파괴, 즉 공급측면 파괴의 전형을 보여줬다.

 

각각의 파괴가 일어날 때마다, 시장점유의 양상은 신규진입 기업에 상당히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평균적으로 신규진입 기업은 진입 첫해에 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하지만 기존 기업이 처음으로 새로운 아키텍처를 보유할 때는 평균적으로 시장의 7%밖에 차지할 수 없었다. 또 기존 기업들은 아키텍처 혁신에 투자하는 R&D 비용 대비 시장점유율에서도 갈수록 하향곡선을 그렸다.

 

 

하지만 기존 기업 중 하나인 캐논은 그야말로 정반대의 행보를 보였다. 네 단계의 파괴를 거치면서도 시장점유율을 지켜낸 것이다. 헨더슨이 볼 때 캐논은 조직통합도 측면에서 경쟁사와 확연히 달랐다. 캐논의 통합조직은 세대별 기술투자를 동시다발적으로 지원했다. 캐논은 전 기술 세대에 걸쳐 폭넓은 역량과 경험을 보유한 끈끈한 단합 팀을 육성했다. 조직구성에서 보듯 캐논은 새로운 제품 아키텍처를 구상하고 그에 대응할 능력을 보유했다. 이와는 정반대로, 캐논의 경쟁사들은 여전히 기존 제품 아키텍처를 중심으로 대규모 조직을 구성했다. 그들은 팀 단위로 높은 효율과 성과를 내기 위해 제품 구성요소에 대한 전문화된 지식을 구축하고, 급속히 성장하는 혁신 창출에 집중했다.

 

캐논은 차세대 제품으로 무장한 경쟁사에 비해 통상 수년이 뒤처지면서 선점 효과를 누리지는 못했다. 하지만 자사 조직구조를 활용해 다른 이점을 확보했다. 특히 캐논의 엔지니어들은 경쟁업체의 혁신에서 힌트를 얻어 제품 구성요소뿐만 아니라 제품 아키텍처에 재투자했다. 실제로 파괴적 혁신의 두 가지 단계인 근접 프린터proximity printer와 스캐닝 프로젝션scanning projection은 캐논이 내부적으로 개발한 기술과 프로세스를 바탕으로 했다.

 

다른 기존 기업들도 신흥기술의 가치를 알아본 건 마찬가지다. 하지만 정작 자신들의 조직모델은 혁신에 저항하는 모습을 드러내는 듯했다. 여기에 전형적 사례 하나를 소개한다. 1965년에 사진석판산업 부품 공급사인 캐스퍼 인스트루먼트Kasper Instruments는 콘택트 얼라이너contact aligner를 시장에 내놓았고, 출시한 지 5년 만에 시장의 절반을 장악했다. 하지만 1973년에 근접기술 역량이 자사 제품을 좀 더 향상시킨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 신기술을 자사에서 내놓았을 때, 얼라이너를 사용하는 마이크로프로세서 제조사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신기술은 1970년 후반에 캐논이 향상된 근접 얼라이너를 소개한 직후에야 급부상했다. 캐스퍼는 초기에 얻은 통찰력을 활용해 수익을 내지 못했다. 근접기술 역량을 도입하려면 얼라이너를 구성하는 부품 간 연결체계를 수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독특한 자산의 중요성

 

캐논과 같은 방식을 취할 때 따라오는 위험성은 이른바 선점자 우위first mover advantage의 상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위험성은 기업이 현재 아키텍처 파괴가 일어나는 제품에서 핵심요소, 즉 고객이 가치 있게 여기는 요소를 보유하면 된다. 이점은 인쇄조판산업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조판산업의 태동은 1400년대와 구텐베르크의 가동활자movable type발명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트마르 머건탈러Ottmar Mergenthaler가 발명한 최초 입력장치인 키보드를 사용한 현대식 조판은 1886년 이후에야 상용화됐다. 머건탈러의 액체 금속활자 주조식자기인 라이노타이프Linotype는 당시에 활자를 주조하는 유일한 방식으로 조판시장을 60년 동안 주름잡았다. 그 후에도 머건탈러라이노타이프 사()는 다른 두 방식의 주조식자기 기업인 인터타이프Intertype, 모노타이프Monotype와 더불어 조판업계를 장악했다.

 

1949년에 접어들면서 조판기술은 변모했고, 액체금속주조활자기술은 제논 플래시xenon flash를 이용한 사진식자기술에 자리를 내주었다. 10년 후 인화기술은 디지털화됐고, 제논 플래시 기술은 음극선관 방식으로 교체됐다. 마침내 1976년에는 오늘날의 레이저조판 기술이 표준화되기에 이르렀다. 헨더슨의 연구를 토대로 짐작해보면 각 신규진입 기업은 개별 혁신단계마다 시장에서 마켓리더로 자리매김했을 것이다. 하지만 머건탈러는 조판산업의 각 혁신단계와는 상관없이 오랫동안 시장지배력을 유지했다.

 

제논 플래시 사진식자기술이 처음 등장했을 당시 머건탈러라이노타이프, 인터타이프, 모노타이프 등 기존 세 기업은 자신들의 미래를 결정지을 전략 수립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이런 신기술을 통합한 기계를 개발했다. 세계적 조판장비 업체였던 인터타이프는 시장 진출에 첫 테이프를 끊었다. 인터타이프는 코닥과 같은 외부 파트너와 협력관계를 맺고, 자사의 기존 장비에 여러 기술의 접목을 시도했다. 하지만 자사 제품 구성요소의 인터페이스와 생산과정에서 근본적 수정을 꾀하지는 못했다.

 

보스턴칼리지 캐럴경영대 메리 트립사스는 자신의 연구에서 당시 머건탈러가 대단히 차별화된 방식을 취했다고 시사한다. 머건탈러는 처음으로 진행한 신규장비 구축에 실패하면서 최초 계획 단계로 되돌아왔다. 또 신기술 보유자들도 채용했다. 나아가, 신규장비는 물론 혁신적 생산방식의 설계를 위해 신규 채용자들과 기존 팀의 긴밀한 통합체계를 구축했다. 캐논의 경우처럼 이런 과정은 머건탈러의 사업속도를 늦추었고, 그 바람에 첫 사진식자기가 나오기까지는 10년이란 시간이 소요됐다. 그렇다면 머건탈러는 어떻게 이러한 사업 지연 속에서도 살아남아 자사의 우세한 제품 아키텍처에서 결실을 보게 된 것일까?

 

 

해답은 간단하다. 머건탈러에는 폰트가 있었다. 식자기를 사용하는 주고객은 신문사와 출판업자였다. 두 기업은 모두 폰트에 따라 전적으로 좌우되는 자신만의 스타일과 분위기를 보유했다. 그런데 이들 폰트의 특허권은 기존 고온금속식자 기업인 머건탈러에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따라서 이른바 핫 폰트 아이템인 헬비티카 폰트에 목을 메는 고객은 머건탈러를 통해 직접 구매해야 했다. 당시 머건탈러는 기업명의의 등록상표 외에는 어떤 특정 지적재산도 보유하지 않았다. 하지만 폰트만으로도 매출을 내기에 충분했다. 인쇄장비의 주요 기술은 수년에 걸쳐 변모했지만, 폰트에 대한 고객 수요는 결코 시들해지는 법이 없었다.

 

물론 세 기업은 모두 폰트를 소유했다. 그렇다면 왜 머건탈러가 나머지 두 기업들보다 좋은 성과를 냈을까?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머건탈러는 폰트를 소유한 덕분에 숨 돌릴 만한 여유를 얻었다. 그리고 이를 십분 활용해 아키텍처 파괴를 연구하면서 결과적으로 사진식자라는 신기술이 이전보다 우세한 조판장비를 시장에 공급하도록 견인했다. 당시 머건탈러는 개별 폰트에 가격을 매겨 파는 쪽을 택해 조판장비의 공급을 포기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디지털조판이 등장하기까지 조판 비용에서 개별 폰트의 가격을 분리하기란 여간 만만치 않았다. 따라서 조판장비의 공급은 비즈니스의 주력 분야로 남았다. 머건탈러가 기존 조판장비 공급 비즈니스에서 벗어나 폰트 마케팅과 라이선싱에 매달릴 수 있었던 것은 디지털조판 시대가 도래하고 난 후의 일이다.

 

어떻게 제품이 만들어지느냐가 관건이다

 

복잡한 기술을 토대로 한 제품 진화의 초기에는 엔지니어들이 부품을 조합하는 다양한 방법을 시험해 본다. 결국 지배적인 제품 아키텍처a dominant product architecture가 등장하면서 부품 기준이 설정되고 부품 간 관계성이 정해진다. 이 단계에서 엔지니어들은 제품의 지배적 디자인 이면에 담긴 원리를 의식적으로 간파한다. 엔지니어들은 제품의 아키텍처 지식을 보유하고 있어, 특정 부품에서의 변화가 다른 부품들의 성능에 미치는 영향을 파악하며, 부품들의 진화에 수반돼 발생하는 상충관계를 관리한다.

 

이때부터 대부분 기업은 제품의 구성요소(부품)를 중심으로 조직을 구성한다. 예컨대 스마트폰에 대해 전문화된 팀은 배터리, 케이스, 입력 스크린 등을 담당한다. 이처럼 이들 제품 구성요소 팀이 각자 제품에서 맡은 부분을 향상시키기 위해 엄청난 공을 들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노릇이다. 이런 노력은 놀랄 만큼 효율적이어서 조직의 순조로운 운영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런 방식에는 골치 아픈 구석이 있다. 전체 제품 아키텍처와 그 안에서 발생하는 대립적 상충관계 및 연결 관계를 인식하는 엔지니어와 디자이너의 능력이 점차 퇴화된다는 점이다.

즉 제품 아키텍처 지식에 대해 마음에만 담아두고 소통하지 않는 것이다.

 

기술 진보가 새로운 제품 아키텍처로 이어질 때 개별 부품 단위로 조직을 구성한 기업들은 보통 휘청거린다. 구성요소 팀이 전문 분야별로 나뉘어 있다 보니 자신들이 집중하는 영역을 벗어난 최신 기술이나 구성요소 조합에 대한 큰 그림을 보지 못하는 이유에서다. 이러한 기업에서는 제품 전반에 대한 아키텍처 설계에 아무도 집중하고 있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새로운 제품 아키텍처가 등장할 때 경영진은 이를 얕잡아보기 십상이다. 통상 신규 제품 아키텍처는 처음에 지속적으로 개선돼 온 기존 제품 아키텍처만큼 좋은 제품 성능을 보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조직의 운영이 직무와 기능의 경계를 넘어 더욱 밀접하게 통합된 기업들은 아키텍처 변화에 (적어도 이론상으론) 우세한 적응도를 보인다. 이런 기업들은 아키텍처 지식을 제대로 알고 있고 폭넓게 공유한다. 또 새로운 제품 아키텍처가 지닌 잠재력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해 제품 생산에서 매우 신속한 성능 향상을 꾀하며 기존 기업의 제품을 대체하는 제품을 창출한다.

 

정체성이 미치는 영향력

 

머건탈러와 캐논의 두 기업 사례가 시사하는 바는, 설령 생산기반 기술이 급변했다 하더라도 최종 제품(신문, 프린터)의 기능이 변하지 않은 경우, 기업은 아키텍처 파괴를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아키텍처 파괴는 제품의 가치 제안에 근본적 변화를 일으키며, 필연적으로 자사 제품의 개발과 생산구조를 변경하고 기업전략을 다시 짜도록 만든다. 이런 파괴를 잘 보여 주는 사례가 사진산업이다.

 

우리는 모두 폴라로이드와 코닥과 같은 선도기업이 필름에서 디지털사진 분야로 넘어가는 데 실패한 사실을 알고 있다. 두 기업은 사업 전환을 고대했지만, 조직적 우선순위와 내부 갈등에 밀려 수익원인 필름에 매달리다, 이윤이 높지 않던 신규 디지털비즈니스 모델로 발 빠르게 갈아타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관행을 깬 기업도 있었다. 후지필름이 그 경우다. 메리 트립사스는 HBR에 실린 테드 레빗Ted Levitt의 중요한 연구논문인마케팅 근시안(Marketing Myopia)’을 토대로 이렇게 설명한다. 기업이 고객 니즈와 욕구에 더해 이를 받쳐주는 신흥 기술과 시장 중심의 외부 지향적 정체성을 확립하면, 굳이 기업의 기존 강점을 희생하지 않고도 자본과 자원에 관련된 피치 못할 갈등을 잠재울 수 있다.

 

경쟁사와 마찬가지로 후지필름은 일찌감치 디지털사진의 잠재력을 실감했다. 그래서 1975년에 신기술 연구에 착수해 1980년 초반에 시제품을 생산했다. 당시 매출의 상당 부분은 필름과 인화지, 인화물질 사업 분야에서 발생했다. 하지만 후지필름은 엑스레이 필름과 프로세서, 마이크로 필름, 그래픽아트 필름, 자기 테이프, 카본리스 복사용지 사업 분야에도 발을 담갔다. 이처럼 폭넓은 역량과 사업 분야를 등에 업고 후지필름은 코닥과 다른 경쟁사가 사진기업이나 필름제조사로서 지닌 이미지를 뛰어넘을 수 있었다. 1978년에는 자사를음향영상정보 레코딩 기업으로 표방하기 시작했다. 이는 후지필름이 좀 더 장기적인 안목에서 자사의 정체성을 특정사진 분야에서 폭넓은이미지와 정보분야로 옮긴 첫 전략적 행보였다.

 

이런 행보는 후지필름에 분명한 전략적 영향력을 끼쳤다. 예컨대 후지필름은 전통적인면도기 및 면도날razor and blades사업 모델을 침해할까 봐 염려하는 일 없이 전자방사선 사진용 고가 하드웨어 제품을 출시할 수 있었다. 이러한 면도날사업 모델에서 사진기업들은 소비자들이 계속 교체해줘야 하는 필름에 맛 들이도록 유도하려고 자사 하드웨어를 저렴하게 제공했다. 이처럼 후지필름의 정체성이 좀 더 포괄적이 될수록 경영진에서는 디지털 세계에 적합한 신규 비즈니스 모델을 짜고 실행하기에 더욱 수월해졌다. 후지필름은 연구개발 조직을 구성하는 방식에서도 경쟁사와는 매우 다른 행보를 보였다. 이를테면 디지털 이미징사업부는 주요 연구개발 부서와 통합했지만 폴로라이드사업부는 별도로 운영했다. 후지필름의 이러한 행보는 자사 디지털사업부에 사업적 타당성을 제공했을 뿐 아니라, 필름사업 분야에서 디지털사업 분야로 옮겨가는 데 따른 내부갈등의 최소화에 한몫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후지필름은 필름비즈니스에서 쌓은 사진인화 화학처리 능력을 바탕으로 신규 이미징 애플리케이션을 확보해 디지털이미지용 디스플레이 스크린 공정에 화학제품을 적용할 수 있었다.

 

후지필름은정보와 이미징기업으로 자리매김해 경쟁사가 실패한 방법을 성공으로 이끌어 디지털 왕국에서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딜레마에 빠진 현실

 

아키텍처 파괴의 위협에 대응하는 일에는 응당 대가가 따른다. 경영진에서 조직적 통합을 이루려면 체화된 아키텍처 지식이 조직의 최상단까지 이르도록 유동적인 팀을 구성하거나 다양한 신구기술을 동시에 아우르는 다기능팀cross-functional teams을 개발해야 한다. 통상 이러한 통합조직모델은 높은 성과 중심의 기존 구성 방안과는 정반대다. 기존 구성방안에서는 개별 단위의 모듈화된 조직과 별도의차세대제품 개발팀을 요구하고 나서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기업들은 딜레마에 빠진다. 모듈화된 조직구조는 부품 혁신을 하는 데는 매우 효율적이다. 하지만 이런 조직구조는 개별 부서간 장벽을 만들어 새로운 아키텍처 지식이 주력사업에 통합되는 길을 막아버린다.

 

그러면 가장 일관성 있는 생존전략은 무엇일까? 수요 측면의 파괴에 대응하려면 보통 신흥 파괴자를 인수하거나, 심지어 이들과 협력체계를 구축하는 방법이 통할 수 있다. 필자의 연구에 따르면 많은 산업에서 파괴자와 기존 기업은 사실상 매우 성공적으로 협력한다. 이는 대담한 파괴자가 나타나 기존 기업의 자리를 꿰차는 전형적 파괴 시나리오가 일반적 방법이 아니란 의미다. 더욱이 기존 기업들이 파괴자를 합병하거나 파괴자의 라이선스를 취하는 사례는 점점 느는 추세다. 이는 수요 측면의 파괴에 직면한 경영진들이 가만히 앉아 있어도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최소한 내부역량 개발은 해야 대응할 수 있다. 실증 사례가 입증하듯 다른 기업을 인수하거나 통합한다든지, 혹은 사업에 유능한 기업들과 협력 관계를 맺는다든지 하는 일에 능숙한 기업은 드물기 때문이다.

 

상황이 어떠하든 기업들은 아키텍처 파괴를 관리하는 데 최대한 주력해야 한다. 이는 아키텍처 혁신이 기업 붕괴의 빌미를 제공할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경영진들은 조직 내 아키텍처 혁신을 수용하고 활용하기 위해 심도 깊은 조직 통합을 이끌어내고 포괄적인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 이와 동시에 파괴를 통해 고객들이 제품에 지닌 긍정적인 경험을 일정하게 유지하도록 핵심요소를 관리해야 한다. 이러한 행보는 경영 핵심과 모범경영 가설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통상 아키텍처 파괴에 관심이 부족한 현실을 감안한다면 이런 현상이 그다지 놀랍지만은 않다.

 

파괴의 관점에서 보면 어떤 기업의 생존능력이 최고라고 해서 실적도 최고라는 법은 없다. 기업들은 견고한 경쟁기업이 될 순 있어도, 선두주자가 될 가능성은 적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최고의 실적을 보유한 기업도 나중에는 휘청거릴 수 있을뿐더러, 나아가 조만간 자신을 한물간 존재로 끌어내릴 파괴에 직면할 수도 있다. 자연 세계에서도 이런 얘기는 어느 정도 통용된다. 판다와 북극곰과 같이 몸집이 크고 특별한 동물은 인류가 자행하는 약탈행위에서 살아남으려 몸부림친다. 이와 반대로 여우나 원숭이와 같이 몸집이 작은 동물은 시내와 도시 틈새에서 살아남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렇다면 환경에 적응할 수 있을까, 없을까? 차이점은, 동물에게는 선택권이 없지만 기업과 경영진에게는 선택권이 있다는 사실이다.

 

 

더 읽을 거리

 

이 글의 의견 가운데 이론적 토대가 궁금하면 다음의 글을 참조하라.

 

Architectural Innovation: The Reconfiguration of Existing Product Technologies and

the Failure of Established Firms”

레베카 M. 헨더슨 & B. 클라크 Kim B. Clark

(Administrative Science Quarterly, 1990)

 

Product Development Capability as a Strategic Weapon: Canon’s Experience in the Photolithographic Alignment Equipment Industry”

레베카 M. 헨더슨

(Managing Product Development, 1996)

 

Surviving Radical Technological Change Through Dynamic Capability: Evidence from the Typesetter Industry”

메리 트립사스

(Industrial and Corporate Change, 1997)

 

Managing in an Age of Modularity”

칼리스 볼드윈 Carliss Y. Baldwin & B. 클라크

(HBR, September-October, 1997)

 

Disruptive Technologies: Catching the Wave”

조지프 L. 바우어 Joseph L. Bower & 클레이턴 M. 크리스텐슨

(HBR, January-February 1995)

 

 

새로운 이야기

 

대부분 경영진은 클레이턴 크리스텐슨이 묘사한 파괴적 혁신 얘기에 매우 친숙하다. 파괴자는 시장에 진입해 기존 기업과 치열하게 경쟁하다 소비자의 관심이 쏠리면서 시장점유율을 잠식해 들어간다. 그래서 이따금 파괴적 혁신 기업과 기존 기업이 서로 경쟁하다 언제 그랬냐는 듯 협력하는 모습을 보면 아주 놀랍게 다가올 수 있다.

 

자동음성인식 산업에서 50년 이상 스타트업 전략을 다룬 최근 연구에서, 매트 마르크스Matt Marx, 데이비드 수David Hsu와 더불어 필자는 크리스텐슨이 언급한 파괴적 정의에 맞아떨어지는 산업의 혁신 문제를 들여다 보았다. 즉 저가시장에 진출해 점차 전통적 기준 대비 제품 성능을 향상시킨 기술을 살펴본 것이다. 이러한 산업에서 신규진입 기업들은 대부분 그러한 혁신기술을 선보였다. 하지만 대체로 기존 기업에 합병되거나 기존 기업과 협력관계를 맺었다.

 

여기에 딱 들어맞는 사례가 블링고Blingo. 블링고는 2010년에 모바일 음성인식 앱을 개발했다. 기존 소프트웨어와는 달리, 블링고의 신기술은 사용자가 미리 정해 놓은 구문만 말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말해도 음성인식이 가능하도록 했다. 물론 신기술은 이전 기술보다는 정확성이 떨어졌다.

 

블링고는 자사 기술을 라이선스해 모바일 디바이스와 다른 기업의 앱에 끼워 넣는 일을 기업의 장기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사업 초반에는 자사 기술의 성능이 뒤떨어졌기 때문에 모바일 공급업체에 소비자가 블링고의 기술을 선호한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했다. 그래서 블링고는 직접 만든 앱을 들고 시장에 진입해 향후 자사의 라이선스 판매 대상 후보인 업체들과 직접 경쟁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블링고의 전략은 고스란히 먹혀 들었다. 고객들은 그 기술에 딸려오기 시작했고, 블링고는 기존 기업들과 맞서 싸우는 대신 협력하는 전략으로 갈아탈 수 있었다.

 

블링고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다른 조건이 같다고 할 때 기존 기업들과 경쟁에 돌입한 신규진입 기업들 사이에서 파괴적 혁신 기술을 지닌 기업들은 그렇지 않은 기업들보다 기존 기업과 협력할 확률이 4배나 높았다. 이 사실은 기존 기업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시사한다. 파괴적 혁신 기술이 검증될 때까지는 기다려라. 그러고 나서 가장 전도유망한 진입 기업과 협력 체계를 구축하라. 이것이 수요 측면의 파괴에 대처하는 성공적인 전략이다.

 

조슈아 건즈(Joshua Gans)는 토론토대 로트먼경영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고, 제프리 S. 스콜(Jeffrey S. Skoll) 이 설립한 스콜재단의 기술혁신과 기업가정신 분야에서 의장직을 맡고 있다. 토론토대 창의적파괴연구소 수석경제학자이자 <파괴 딜레마(The Disruption Dilemma, 2016, MIT Press)>의 저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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