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9-10월(합본호)

링컨과 변혁적 리더십의 기술
도리스 컨스 굿윈(Doris Kearns Goodwin)

FEATURE LEADERSHIP

링컨과 변혁적 리더십의 기술

도리스 컨스 굿윈


 

대가 리더를 만드는가? 아니면 리더가 시대를 만드는가? 리더는 어떻게 사람들의 삶에 목표와 의미를 불어넣는가? 도리스 컨스 굿윈이 새 저서 <Leadership in Turbulent Times>에서 던진 질문이다. 굿윈에 따르면 리더십은 변혁형, 위기관리형, 반전형, 선견지명형의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굿윈은 에이브러햄 링컨, 시어도어 루스벨트, 프랭클린 루스벨트, 린든 존슨 등 네 명의 대통령이 대격변의 시기에 미국을 이끈 역사적 사례를 바탕으로 이들의 스킬과 강점을 리더십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다음은 노예해방선언 발표를 이끈 링컨의 중요한 결정에 관한 굿윈의 케이스 스터디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노예해방은 내각, 군대뿐 아니라 결정적으로 미국 국민의 지지가 뒷받침돼야 가능했다. 굿윈에 따르면 분열된 시대의 역사적 난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타고난 리더는 없다. 오히려 리더들은 투쟁하는 데 타고난 사람 같다. 회복력이 가장 큰 강점이었다. 감성지능이 풍부했던 링컨은 자비로운 동시에 냉혹했고, 자신만만하면서도 겸손했으며, 인내심이 있으면서도 끈질긴 사람이었다. 당파적 갈등을 중재하는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국민들의 정신적 지주가 됐다. 그는 분열된 국민의 상충된 의견을 모두 수용하는 동시에 그들에게 통합된 미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보여주는 뛰어난 능력을 보여줬다.

 

1862 7 22,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특별 내각회의를 소집해 노예해방선언의 예비 초고를 공개했다. 내각과 이 문제를 토론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당시 해군장관 기디언 웰스Gideon Welles의 회고에 따르면 링컨은 회의가 시작되자노예 문제에 관해 내각에 의견차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며 이 기밀서류를 읽고 어떤 제안이라도 해 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여기에는이미 마음속으로 결심이 섰으며, 이 선언에 대한 책임은 본인이 지겠다는 링컨의 뜻이 담겨 있었다. 대담하게 실행에 나설 차례였다.

 

노예해방선언은 남북전쟁이 왜 벌어져야 하며 북부연합군the Union은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가의 문제에 근본적 변화를 일으킨 사건이었다. 링컨이 이런 판단을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어떻게 그는 분열된 내각, 회의적인 군대, 갈라진 북부 국민들을 설득할 수 있었을까? 물론, 전쟁의 참상과노예제는 불의와 잘못된 정책에서 나온 제도라는 그의 오랜 믿음이 핵심 요인이었다. 링컨은노예제가 나쁘지 않다면 도대체 뭐가 나쁜 것인가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이 모든 요인을 지탱한 것은 그의 견고한 감성지능이었다. 공감능력, 겸손, 일관성, 자기 인식, 자기 규율, 관대함 등이 그가 노예해방을 선언하게 만든 근본적 힘이었다. 링컨의 이런 자질은 분단된 국가를 통합시켜서 완전히 변혁해야 하는 리더가 반드시 갖춰야 할 요소로 직급에 상관없이 모든 리더들이 배워야 할 강력한 교훈이다.

 

정책이 실패하면 방향을 바꿔야 한다. 1862 6월 마지막 주, 북부연합군 조지 B. 맥클래런George B. McClellan장군의 포토맥 군대는 첫 대규모 공격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버지니아 반도 리치몬드에 위치한 남부연합의 수도로 진격하던 맥클래런 부대는 이후 벌어진 수차례의 혈투에서 로버트 E. Robert E. Lee장군이 이끄는 남군에 계속 참패했다. 후퇴를 거듭하던 북군의 상당수가 죽었다. 거의 16000명이 사망하거나 포로로 잡히거나 다쳤다. 맥클래런 장군의 부대 전체가 항복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북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불런Bull Run전투 직후보다 더했다. 링컨은 그해 여름을 이렇게 회상했다. “사태는 끝을 모를 정도로 나빠지기만 했다. 우리가 추진한 작전도 끝장난 것 같았다. 우리는 이미 마지막 패를 써버렸고 전략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7 22일 대통령이 내각을 소집해 노예해방선언을 읽기 전 상황이었다. 링컨은 반역세력의 재산을 법적으로 몰수할 수도 있다고 그 방법을 열거하며 노예해방 보상안을 실시하자고 반복했으며 연방을 수호하겠다는 목표를 재차 강조했다. 그런 다음 그가 읽은 다음 한 문장은 미국의 역사를 바꿔 놓았다.

이러한 목적[연방의 존속]을 위한 적합하고 필요한 군사적 조치로서, , 미합중국 육군과 해군 총사령관은 미합중국의 헌법이 인정되지도, 준수되지도, 보존되지도 않는 주에서 노예로 종사하던 모든 사람이 1863 1 1일부터 영원히 자유의 몸이 될 것을 명령하고 선언한다.

 

이 선언이 다루는 내용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미 대통령이 연방 수호와 노예제 폐지를 하나의 윤리적 목표로 묶어버린 것이다. 세대를 이어 노예로 살아온 남부의 흑인 350만 명이 자유를 약속 받았다. 78개 단어로 이뤄진 한 문장이 근 75년간 상하원의 정책적 기반이 됐던 노예제와 재산권 관련 법률을 뒤집은 것이다. 그러나 링컨은 노예해방선언의 발효일자를 6개월 연기했다. 남부의 주들이 노예를 강제로 뺏기기 전에 전쟁을 끝내고 연방으로 복귀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다.

 

의견 충돌을 미리 내다보라.링컨은 선언문을 읽기 전에 본인이 마음을 굳혔다는 것을 넌지시 알리면서도 내각에 찬반 관계없이 어떤 의견이든 받고 싶다고 말했다. 링컨의 내각은라이벌들의 팀이었다. 링컨은 내각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철저하게 파악했다. 그러니 어떤 반대 의견이 나와도 대답할 준비가 돼 있었다. 내각을 연방의 주요 지리적, 정치적, 사상적 분파를 대표하는 사람들로 꾸린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몇 달간 링컨은 연방 존속 방법을 두고 다투는 내각의 의견을 듣기만 했다. 결정적 순간마다 이런저런 각료들이 나서서 링컨을 비난했다. 너무 급진적이다, 너무 보수적이다, 뻔뻔한 독재자다, 너무 무책임해서 위험할 지경이다 등등. 링컨은 내각이 제시하는 다양한 의견을 모두 수용하면서 본인의 입장이 명확해질 때까지한 쪽 의견과 그에 뒤따르는 모든 문제들을 검토했다. 이런 의사결정 과정은 한 번에 모든 사람의 입장을 수용할 수 있는 그의 타고난 능력 때문에 가능했지만 일견 지나치게 품이 많이 드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러나 링컨은 한번 행동하기로 결정하면 언제 실행할지를 고민하지, 무엇을 할 것인지는 더 고민하지 않았다.


 

육군장관 에드윈 스탠턴Edwin Stanton과 법무장관 에드워드 베이츠Edward Bates는 각각 링컨 내각에서 가장 급진적이고 가장 보수적인 인물로 유일하게 이 선언을 강력 지지했다. 스탠턴은 이 선언을즉각 공표하라고 권했다. 내각에서 사면초가에 처한 군대 입장을 누구보다 가장 잘 알았던 스탠턴은 노예해방이 군에 크게 이로울 것임을 간파했다. 남군 병사들이 나가서 싸울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없어도 노예 노동으로 남부의 농장과 플랜테이션이 계속 유지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입헌주의자 베이츠도 해방된 흑인에 대한 송환 계획이 수립돼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우기는 했지만 의외로 진심으로 동의했다.

 

해군장관 웰스는 당시 침묵을 지켰지만 이 선언의중대함과 예측할 수 없는 결과’, 장엄함과 무게감에 꼼짝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됐다고 나중에 털어놨다. 그가 우려했던 것은전쟁력의 극단적 행사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노예 소유주들의 필사적 반발로 전쟁이 더 길어지고, 전례 없는 참상을 보게 될 것이 두려웠다. 인디애나 주 출신의 보수적 휘그당원인 내무장관 칼렙 스미스Caleb Smith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나중에 내무차관에게 털어놓기를만일 링컨이 이 선언문을 그때 발표해 버렸다면 바로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 링컨 행정부를 공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체신부장관 몽고메리 블레어Montgomery Blair는 이 선언에 극렬 반대했다. 북부에 우호적인 남부 경계 주들을 대변하던 블레어는 메릴랜드에 오기 전 미주리 주에서 법률가로 일했다. 그는 노예해방이 선언되면 경계 주의 북부연합 지지자들이 분리독립파(남부)로 돌아설 것이라 봤다. 더구나 다가오는 가을 선거를 앞두고 공화당의 패배를 우려한 북부 보수주의자들이 강력 항의할 수도 있었다. 링컨은 블레어의 반대 의견을 여러 측면에서 고려했지만 노예문제의 중요성이 당파 정치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는 블레어에게 협상을 위해 얼마나 꾸준히 노력해 왔는지를 생각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면서도 블레어가 서면으로 반대 의견을 제출하는 것을 기꺼이 허용했다.

재무장관 샐먼 체이스Salmon Chase는 내각에서 노예제 폐지를 가장 강력하게 지지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계획에 경악했다. 체이스는내가 제안한 것 이상이었다고 인정하면서도 일괄적인 해방은 한편으로는 학살, 다른 한편으로는 반란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데이비드 헌터David Hunter장군이 그해 봄 사우스캐롤라이나, 조지아, 플로리다를 아우르는 휘하 지역에 노예해방령을 내린 것처럼 이런 위험한 문제는 단계별로 처리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체이스와 노예제 폐지론자들은 링컨이 헌터의 명령을 즉각 무효화했을 때 깊이 절망했는데 그럼에도 링컨은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내 수하의 사령관이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이런 복잡한 문제는 현장 지휘관의 결정에 맡기는 것이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런 복잡한 정책이야말로 행정부 리더십이 결정해야 할 문제였다.

 

국무장관 윌리엄 수어드William Seward는 국제주의적 관점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유럽의 눈치를 살폈다. 해방선언으로 인종전쟁이 벌어지고 목화 생산에 차질이 빚어지면 미국산 목화를 수입해 방직공장을 돌리던 영국과 프랑스의 지배계층이 남군 편을 들며 개입할 수도 있었다. 링컨은 이런 주장도 주의 깊게 들었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 국민들은 정부를 압박해 노예제를 폐지한 역사가 있었다. 링컨은 연방이 노예해방에 전력을 다 한다면, 유럽이 쉽사리 남부연합을 편들지는 않을 것이라 믿었다.

 

후퇴할 때와 전진할 때를 구분하라. 이런저런 불협화음과 의견 충돌에도 불구하고 링컨은 한 번 정한 행동 방침을 굳건히 지켰다. 회의가 끝나기 전 수어드는 언제 공표할 것인지 민감한 질문을 했다. 수어드는전세가 바뀌면서 국민의 불안감이 매우 큽니다. 해방선언을 하게 되면 마지막 발악처럼 비칠 수도 있습니다라며승리의 독수리가 날아오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해방선언을 독수리 목에 다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링컨은이번 문제를 여러모로 숙고했지만 제가 완전히 간과한 부분이군요라며그러니 해방선언의 초고는 일단 미뤄두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두 달간 그는 전장에서승리의 독수리가 날아올랐다는 소식을 기다리며 묵묵히 버텼다. 마침내 리 장군의 군대가 메릴랜드와 펜실베이니아에서 후퇴하면서 전세가 뒤집히기 시작했다. 23000명이 사망한 앤티텀Antietam 전투는 미국 역사에서도 가장 끔찍한 날로 기록됐다. 무시무시한 학살로 양쪽 진영 다 인사불성의 마비 상태가 됐다. 이런 악몽과 같은 승리를 링컨이 바라거나 기도했던 건 아니지만 노예해방 계획을 실행에 옮길 적기였다. 앤티텀의 승전보를 듣자마자 링컨은 노예해방선언의 초고를 고쳤다. 승리의 독수리가 날아오른 지 5일이 지난 9 22일 월요일, 그는 내각을 다시 소집했다.

 

7월부터 미뤄온 행동을 개시할 시간이 됐다. “더 나은 시기였으면 좋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더 나은 상황이었으면 좋았겠지요.” 링컨은 노예해방선언이라는 심각한 얘기를 불쑥 꺼내 들었다. 하지만 체이스 재무장관의 일기장에 따르면 링컨은리 장군의 군대가 메릴랜드에서밀려나면노예해방선언을 발표하겠다고 스스로와 약속하고 (약간 망설이다) 주님께 약속했었다고 털어놨다. 링컨은이 결정은 이미 정해진 것이고 바꿀 수 없다고 선언했다. “행동과 책임은 전적으로 저에게 있습니다. 몇 주 동안 숙고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 조치가 정당하다는 확신을 굳히게 됐습니다.” 링컨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일부 수정한 노예해방선언을 읽어 나갔다.

 

링컨 내각은 이질적인 파벌들이 모인 연방의 축소판과 다름없었다. 각료들이 이 중차대한 시기에 뜻을 모으지 못하면 국가를 통일할 수 있는 기회도 사라질 터였다.

 

모범을 보여라. 링컨은 어떻게 이토록 자부심 넘치고, 야심있고, 호전적이고, 질투심 강하고, 각자 능력이 특출한 사람들을 설득해 전쟁의 대의를 바꿀 수 있었을까? 해답은 링컨의 공감능력, 자기 인식, 겸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자기 야망보다 따뜻한 관심을 우선으로 했다. “제가 대통령으로 있는 동안은 그 누구의 마음에도 고의로 상처 주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링컨의 마음가짐은 늘 이랬다.

링컨은 일상에서도 팀원들을 원한이나 개인적 분노 때문에 못되게 구는 법이 없었다. 그는 내각의 어떤 주장도 허용했지만 공개적으로 서로 공격하는 걸 보면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 될 것이라고 각료들에게 주의를 주기도 했다. “그런 식의 저격은 저에게도 잘못하는 것이지만, 국가에도 도움이 안 되는 일입니다.” 그가 내각에 이런 예의범절을 요구한 이유는 악의를 갖고 장난치기에는 각료들이 다루는 문제가 너무나도 중차대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같은 철학에 기초해 내각을 운영했으며 이런 기조는 지금도 미국 내각의 바탕이 되고 있다.

 

팀원들의 감정적 니즈도 생각하라. 링컨은 내각 각료들의 다양한 니즈를 주의 깊게 살피며 리더십을 키워 나갔다. 링컨은 처음부터 전국적 국제적 유명세를 떨친 수어드가 국무장관 감이라고 생각했고 특별한 대우를 받아 마땅하다고 여겼다. 링컨은 수어드가 가진 코스모폴리탄적 매력과 수어드 주변의 세련된 사람들에게 매료됐다. 심지어 그가 모두의 예상과 달리 공화당 대통령후보 지명에서 실패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받은 상처를 세심히 살피기도 했다. 링컨은 종종 길 건너 라파예트 파크Lafayette Park에 있던 수어드의 저택을 방문하곤 했다. 둘은 벽난로 불을 쬐며 담소를 나누고 웃고 서로를 격려하며 동지애를 키웠다. 링컨은 예민하고 거친 스탠턴 육군장관과도 아주 살갑진 않지만 가까운 관계였다. 스탠턴 육군장관을 애정 어리게 군신마르스라고 부르며그가 받는 스트레스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라고 격려하곤 했다. 링컨은 스탠턴의 스트레스를 풀어주기 위해 어떤 일이든 하려고 했다. 전신국에서 스탠턴의 손을 잡고 앉아서 전장의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기도 했다.

 

링컨은 그 누구보다 수어드와 스탠턴에게 주로 의지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편애가 불러올 시기심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각료 한 명 한 명과 각별한 시간을 보내곤 했다. 백악관에서 해군부로 이어지는 오솔길에서 해군장관 웰스를 불러 세우거나 재무장관 체이스의 대저택에 갑자기 들르기도 했다. 체신부장관 블레어 일가 전부와 식사를 하기도 하고, 늦은 오후 법무장관 베이츠와 내무장관 스미스를 초대해 함께 마차를 타고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링컨은 누구나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칭찬받고 격려받고 싶어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메모를 써서 감사를 전했다. 전쟁에서 승리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해방선언을 발표해야 한다는 국무장관 수어드의 제안이 독창적이고 유용했다며 공개적으로 칭찬하기도 했다. 그는 일명 바다의 신넵튠인 해군장관 웰스에게 지시를 내리면서도저는 결코 해군부가 막중한 책임과 힘든 임무를 게을리했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귀하의 지휘하에 해군부는 큰 성공을 거뒀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재무장관 체이스가 임명한 인사를 해임해야 할 때도 링컨은 괴팍한 체이스가 분노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상황이 악화되길 바라지 않은 그는 그날 저녁 체이스를 찾아갔다. 그리고 긴 팔을 체이스의 어깨에 두른 채 왜 이런 결정이 필요한지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야심 많은 체이스는 링컨의 결정이 답답할 때도 많았지만대통령은 늘 나에게 친절했고, 대의의 정당함과 진실성을 보여줬기에 차마 신뢰를 져버릴 수 없었다. 그러니 계속 일할 수밖에 없지 않으냐고 말했다.

 

과거의 분노를 곪게 놔두지 말라.링컨의 오랜 친구 리어나드 스웨트Leonard Swett가 지켜본 바에 따르면 링컨은 내각을 선정할 때 본인의 호불호를 기준으로 삼지 않았다. 특히 과거의 실책을 괘념치 않았다. ‘앞으로 잘하면 그만이라고 여겼다. 그랬기에 스탠턴은 과거 링컨과 반목한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육군장관에 임명될 수 있었다. 링컨과 스탠턴은 신시내티의 대형 특허사건에서 처음으로 마주쳤다. 명석하고 의욕적인 스탠턴은 이미 전국적으로 유명한 변호사였다. 반면 링컨은 일리노이에서나 알려지기 시작한 인물이었다. 링컨의 삐뚜름히 빗은 머리, 얼룩진 셔츠, 긴 팔다리에 안 어울리는 짧은 코트와 바지를 흘깃 본 스탠턴은 파트너 변호사였던 조지 하딩George Harding에게왜 저렇게 무식하게 팔만 긴 원숭이를 여기에 데려온 거요? 아는 것도 쥐뿔 없고 별로 득 될 일이 없어 보이는데라고 말했다. 그는 이 촌뜨기 변호사를 아예 무시했다. 링컨이 정성 들여 준비한 요약자료를 열어 보지도 않고 의견을 묻지도 않았으며 단 한마디도 걸지 않았다.

 

링컨은 모욕감을 느꼈지만 오히려 자기 스스로를 돌아봤다. 더 실력을 쌓아야겠다는 본능적인 욕구가 생겼다. 그는 그 주 내내 법정에 나와 스탠턴의 변론을 유심히 들었다. 링컨은 그토록 완벽하고 꼼꼼하며 철저하게 준비된 변론은 본 적이 없었다. 스탠턴의 파트너는 링컨이 결코 그 일을 잊을 수 없었을텐데스탠턴을 내각에 부르는 게 국가 차원에서 큰 이득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개인적 원한은 누르고 그를 육군장관 직에 임명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고 말했다.

 

스탠턴의 개인 비서는이렇게 완전히 타협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다른 두 사람도 드물 겁니다라고 회고했다. 링컨이 말 안 듣는 부하에게 실수를 고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주는 타입이라면 스탠턴은 복종하지 않으면 바로 잘라버리는 타입이었다. 링컨이 정이 많고 인내심이 강하며 투명한 사람이라면, 스탠턴은 무뚝뚝하고 철두철미하며 비밀스러운 사람이었다. “서로 성격적으로 보완해 주는 관계였어요. 둘 다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걸 잘 알았습니다.” 링컨과의 동업이 끝났을 때 스탠턴은 링컨을 존경하는 데 머물지 않았다. 스탠턴은 링컨을 사랑했다.

분노 때문에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말라.주변 사람들 때문에 화가 날 때 링컨은 편지, 일명핫 레터를 휘갈겨 쓰며 눌러왔던 분노를 표출하곤 했다. 그런 다음 편지를 옆에 놓고, 흥분을 가라앉힌 후 좀 더 맑은 정신으로 사안을 들여다봤다. 링컨의 문헌이 20세기 초반 공개됐을 때, 사학자들은 그런 편지를 뭉텅이로 발견했다. 아래에는 링컨의 메모가 있었다. “보낸 적도, 사인한 적도 없음.”

 

그의 그런 인내는 팀 전체에 모범이 됐다. 어느 날 저녁, 링컨은 스탠턴이 어떤 장성 때문에 화가 나 불평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 “아무래도 본인한테 직접 말해야겠습니다.” 스탠턴은 으르렁댔다. 링컨은그렇게 하세요. 다 쓰세요라고 제안했다.

 

스탠턴은 편지를 써서 대통령에게 가져와 읽었다. “대단하군요라며 링컨은이제 그 편지 어떻게 할 거예요?”라고 물었다.

 

“보내야죠, 당연히!”

 

“나 같으면 안 그러겠소. 쓰레기통에나 버려요.”

 

“하지만 이틀이나 걸려 쓴 겁니다.”

 

“그랬겠죠. 그래서 기분이 훨씬 좋아졌지 않소링컨이 답했다. “기분이 좋아졌으면 편지도 사명을 다 한거요. 그냥 쓰레기통에 버려요.” 스탠턴은 투덜대긴 했지만 곧 링컨의 말에 따랐다.

 

링컨은 본인 스스로도 분노가 가라앉을 때까지 행동을 자제하는 편이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권했다. 자신에게 쏟아지던 마구잡이식 비난도 기꺼이 용서했다. 전쟁 초기 체신부장관 블레어가 링컨에 대해 쓴 노골적인 편지가 몇 달 후 예기치 않게 언론을 통해 공개되자 당황한 블레어는 백악관에 이 편지를 들고 찾아가 사임을 표했다. 링컨은 그에게 그 편지를 읽을 생각도 없고, 블레어를 벌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고 하면서잊어버려요, 다시는 입에 올리지도 생각하지도 마십시오라고 답했다.

 

비난 받는 동료를 보호하라.해군장관 웰스는 링컨이내각이 저지른 실수는 내각이 아니라 대통령 책임이라고 단언하는 데 늘 경탄했다. 링컨은 자신이 내린 결정 때문에 부하직원이 비난을 받지 않게 했다. 맥클래런 장군은 버지니아 반도에서의 참패가 육군부에서 충분한 병력을 투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스탠턴에 대한 악의적 비난이 잇따랐고, 그의 사임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하지만 링컨은 스탠턴 육군장관을 공개적으로 옹호했다.

 

링컨은 일단 신문 지면을 장악할 만한 극적인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모든 정부 부처의 업무를 오후 1시에 중지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면 의사당 계단에서 열리는 대규모 연방집회에 모두 참석할 수 있으리란 계산이었다. 집회에서 링컨은 맥클래런 장군의 주장을 직접 맞받아쳤다. 그는 징집할 수 있는 장병은 모조리 힘을 보태기 위해 파견했다고 주장했다. “육군장관이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박수소리가 커지자 링컨은 덧붙였다. “스탠턴 장관은 용감하고 능력 있는 사람입니다. 책임은 육군장관이 아닌 저에게 있다는 것을 오늘 이 자리에서 말씀 드리는 것이 옳다고 믿습니다.” 링컨은 사면초가였던 스탠턴을 강력하게 옹호했고 덕분에 반대 여론도 곧바로 잦아들었다.

 

링컨이 백악관 가족을 감동시키고 변화시킬 수 있었던 원동력은 결국 링컨의 성격, 즉 일관된 섬세함과 인내, 신중함, 공감능력에서 나왔다. 위대한 팀 리더십은 선한 마음에서 나온다. 하지만 링컨은 부드러움과 다정함 뒤로 그 누구보다 복잡하고 야심차고 고집 세고 무자비한 리더였다. 링컨 팀의 멤버들은 자기 마음대로 야심을 부릴 수 있었다. 링컨을 비난하고, 조롱하고, 시비걸고, 화나게 하고, 심하게 압박할 수도 있었다. 열정과 스킬로 직무에 충실하기만 하면, 또 정해진 방향에서 이탈하지만 않으면 링컨은 그 어떤 행동도 용인했다.

 

1862 9 22일 링컨이 예비 선언문을 발표하겠다고 내각에 말했을 때 내각이 이를 만장일치로 지지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각자 의견이 달랐으며 의구심도 계속됐다. 해군장관 웰스는 여전히 못마땅했지만 대통령이 전적으로 책임진다면 동의하기로 마음먹었다. 대통령이 모든 주장을친절하고 사려 깊게경청했다는 데 만족한 재무장관 체이스도 마침내 동의했다. 내무장관 스미스는 사임하겠다고 협박하다 포기했고, 체신부장관 블레어는 서면으로 반대 의견을 제출하라는 링컨의 제안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날 노예해방선언이 신문에 실리자 처음과는 달리 내각전체가 대통령을 지지하고 나섰다. 결정적 순간에는 연합 전선을 형성한 것이다.

내각의 의구심을 이겨내고 설득하는 것은 국가 통합에 이르는 첫걸음이었을 뿐이다. 노예해방선언이 발표되기는 했지만 발효일자인 1863 1 1일까지는 100일이 남아 있었다. 그때까지 평온할 리가 없었다. 링컨의 리더십을 시험에 들게 하는 고난의 시기였다. 블레어가 예측했듯이 보수주의자들은 노예해방선언에 분노했고 임기 중반에 들어선 공화당은 숨을 죽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링컨의 비서 존 니콜라이John Nicolay우리는 모든 것을 잃었다고 탄식했다. 12, 북군은 프레더릭스버그Fredericksburg에서도살장같은 함정에 빠져 13000명의 사상자를 내고 말았다. 폭풍 같은 비난이 사방에서 링컨을 옥죄어 왔다.

 

약속을 지켜라. 1 1일이 다가오자 국민들은 그날 해방선언을 발효하겠다는 대통령의 공약이 지켜질지 다들 의심하는 분위기였다. 비판론자들은 노예해방이 시행되면 남부에서는 인종전쟁이 벌어지고 북군 장교들은 사임해 버릴 것이며 10만 명에 이르는 장병들이 무기를 내려 놓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노예해방이 공화당과 민주당 연방주의자들의 불안한 연정을 깨뜨릴 것 같았다.

 

“링컨이 이 난관을 헤쳐 나갈 배짱이 있을까?” 뉴요커 지는 냉소했다. 하지만 에이브러햄 링컨을 가장 잘 아는 이들이라면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링컨은 일생 내내 그가 내뱉은 말의 명예와 무게를 지키기 위해 살았다. 링컨은 매사추세츠 주 의원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미 뱉은 말입니다. 다시 되돌릴 수 없어요.”

 

대표적 노예제 폐지론자 프레더릭 더글러스Frederick Douglass는 링컨이 선언문을 발표할 때 너무 뜸을 들이는 데 진저리를 내기도 했지만 링컨이 엄숙하게 선언한 말과 대의를재검토하거나 철회하거나 부인하지 않을 사람이라고 믿게 됐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더글러스는 링컨이뒷걸음 치지 않는사람이라고 판단했다. “그 무엇도 믿지 말라면서 자기 말은 믿게 만드는 사람이라고 평했다.

 

감정적 반응을 살펴라.새해 전날 링컨은 세 번째로 내각을 소집해 최종적으로 노예해방선언문을 읽었다. 이번 버전에는 9월 초고에서 한 가지 크게 달라진 점이 있었다. 폐지론자들은 지난 몇 달간 계속 흑인 모병을 주장했다. 링컨은 망설였다. 너무 급진적이라 시기상조이고 불안한 연정을 깨뜨릴 위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최종적으로 지금이 적기라고 판단했다. 링컨은 의회에 나가평화로웠던 과거에 지키던 원칙을 오늘날 이 혼돈의 시기에도 지킬 수는 없습니다. 전례 없는 상황에 처한 만큼 새로운 생각과 행동이 필요합니다.” 해방선언문에는 군대에서 흑인을 병력으로 소집할 수 있다는 조항이 새로 추가됐다. 체이스 장관의 제안으로 이 조항은인류의 현명한 판단과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로운 사랑으로라는 겸손한 문구로 끝맺었다.

 

더글러스에 따르면 노예해방이 발표되자 뉴잉글랜드의 반응은기쁨과 반가움’ ‘흐느낌과 눈물등으로 열광의 거대한 도가니 같았다. 하지만 이런 환희는 북부에 호의적이던 남부의 경계 주나 북부연방의 다른 주로까지 퍼져나가지 못했다. 앤티텀에서 간신히 거둔 승리가 노예해방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누르고 있었지만 프레더릭스버그에서의 치욕적 패배와 그해 겨울의 교착상태로 인한 분노는 최고조에 달했다. 의회에서는독사Copperheads라 불리던 평화민주당(Peace Democrats)이 사기가 바닥에 떨어진 틈을 타 새로운 징병법에 반대하고 나섰고 심지어 병사들에게 공개적으로 탈영을 촉구하기까지 했다. 전장에서 작성한 보고서에도 노예해방이 장병들에게 부정적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군인들은 기만당했다고 주장하며 그들이 전장에 나선 것은 흑인이 아니라 연방을 위해서였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링컨은 대중의 정서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오랜 친구인 오빌 브라우닝Orville Browning이 북부연방이 민주당을 앞세워타협을 보려고 법석 떤다고 떠들고 다니자 링컨은 민주당이 양보하면 국민이 민주당을 떠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또 링컨은 해방선언으로 군대가 와해될 것이라고 우려하지 않았다. 사기가 흔들리면서 노예해방에 따른 갈등이 고조되고 탈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탈영자 수가 군대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오히려 노예해방에 감명받은 이들이 자원 입대하면 떠난 병력의 자리를 메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링컨은 확신이 있었고 수많은 회의론자들에게 전쟁의 대의를 새로 세워야 할 때가 왔다고 설득했다.

 

실제로 에이브러햄 링컨의 변혁적 리더십은 노예해방에 대한 병사들의 입장을 바꾸는 데 가장 큰 효과를 발휘했다. 전쟁이 발발하고 첫 18개월간 노예해방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걸겠다는 병사는 열 명 중 세 명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연방의 존속이라는 대의를 위해서만 싸웠다. 이 비율은 노예해방선언문이 발표된 후 달라지기 시작했다. 링컨의 리더십을 따라 압도적 다수가 노예해방과 연방 존속을 불가분의 관계로 보기 시작했다. 링컨은 어떻게 자신의 대의를 효과적으로 전달했을까?



신뢰를 쌓아라.장병들의 이런 변화는 링컨이 전쟁 초기 일반 사병들의 깊은 신뢰와 충성심을 받은 데서 비롯한다. 사병들이 집에 보낸 편지에는 링컨이 자신을 가족처럼 대하며 깊은 공감, 책임감, 다정함, 편안함, 아버지와 같은 따뜻함을 보여줬다는 이야기가 흔하게 써 있었다. 사병들은 링컨을 그들과 비슷한 사람으로 여겼다. 전장에 나가면서 링컨 사진을 갖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이토록 링컨과 굳건한 신뢰를 쌓은 사병들이 연방을 위해서만 싸울 수는 없었다. 어느 병사는링컨 대통령이 이제부터 노예를 모두 해방시키라고 한다면, 아멘이라고 편지에 썼다. 또 어떤 병사는노예제 폐지에 찬성한 적은 없지만 노예해방을 위해 기꺼이 싸울 준비가 돼 있다고 털어놨다. 새로운 방향이 정해졌고, 사람들은 이를 받아들였다.

 

흑인 병사의 모병은 노예해방선언에 따른 변화를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었다. 흑인들은 입대 요청에 열광적으로 응했다. 이때 북군에 입대한 흑인 수는 거의 20만 명으로 기록적인 수치였다. 기록에 따르면 그들의 용맹함 또한 놀라웠다고 한다. 제임스 G. 블런트James G. Blunt장군은 흑인 입대 직후 교전을 벌인 후 이렇게 썼다. “흑인 부대처럼 싸우는 자들을 본 적이 없다. 탁월한 용기와 침착함으로 마치 베테랑과 같이 싸웠다.” 포트 허드슨Port Hudson전투 후 백인 장교는 공개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며칠 전 전투를 치른 후 흑인 병사들에 대한 내 편견은 완전히 사라졌다. 흑인 여단의 움직임은 훌륭했고 전투력도 대단했다. 최고였다.” 링컨은 이전에 노예해방에 반대했던 장군들도 이제는 노예해방과 유색인 장병의 활용이 반란군에 가장 큰 치명타를 입힐 수 있음을 믿는다고 강조했다.

 

링컨은 신중하게 추이를 관찰하면서대중의 감정이 천천히 그러나 분명 크게 달라지고 있다. 위대한 혁명과도 같다고 말했다. 그는 내각 구성원들의 입장 변화도 경청하며 살폈다. 그는 신문 사설의 방향, 북부 사람들 사이 오가는 대화의 분위기, 그리고 가장 중요한 군대의 의견 변화를 날카롭게 짚어냈다. 링컨은 노예해방선언이 발효되면 격렬한 반대에 부딪칠 게 당연하다고 여겼지만 그 반대가 대의를 앞설 만큼 강력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어떤 언론인은 타이밍을 정하는 링컨의 예민한 감각이 타고난 리더십의 비결이라고 평했다. “그는 언제나 상황이 유리할 때 움직였다. 사건이 벌어져 어쩔 수 없이 끌려가거나, 사건이 일어나면 분투하느라 미리 힘을 빼 버리는 일이 없었다.” 링컨 스스로도대중의 감정적 지지만 있으면 어떤 일이든 성공할 수 있다. 반대로 대중의 감정적 지지를 받지 못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지치고 전쟁에 대한 피로감이 만연하던 시기, 링컨은 두 번째 한 방을 날렸다. 누군가는 건국의 아버지들이 세웠던 이 실험적인 나라가 묵시록적 종말을 맞고 있다고 걱정했지만 링컨은 새로운 자유가 움트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노예해방선언의 발효를 한 달 앞두고 의회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국민 여러분, 우리는 역사의 흐름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통과해야 할 불같은 시련이 다음 세대가 우리를 명예로 기억할지, 불명예로 기억할지를 판가름할 것입니다. 노예에게 주어지는 자유는 있는 그대로 우리가 지켜온 그대로 명예로운 자유여야 합니다. 우리가 인류의 마지막이자 가장 위대한 희망을 당당하게 지켜내지 못하다면 비열하게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의 리더십은 남북전쟁이라는 오랜 불행에 도덕적 대의를 불어넣었다. 인간과 시대의 위대한 만남이었다.

 

도리스 컨스 굿윈(Doris Kearns Goodwin)은 사학자이자 퓰리처상 수상 작가로 미 대통령의 전기를 여러 권 집필했다. 저서로는 <No Ordinary Time> <권력의 조건> <The Bully Pulpit> <Lyndon Johnson and the American Dream>이 있다. 근저로 <Leadership in Turbulent Times> 2018 9 Simon & Schuster에서 출간될 예정이다.

 

번역 송채영 에디팅 배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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