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EI 회장의 아이디어 임팩트 측정법
아서 C. 브룩스Arthur C. Brooks
2008년 여름 깜짝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시라큐스대 교수로 즐겁게 일하고 있었다. 이전 1년 동안 미국기업연구소American Enterprise Institute·AEI는 새 회장을 찾고 있던 터였다. AEI는 미국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잘 알려진 연구기관 중 하나로, 잠깐 같이 일했던 적이 있는 곳이다. 내가 그 자리를 기대했을까?
싱크탱크 산업은 매우 작아서 확실한 리더 공급 파이프라인이 없다. 이사회는 어떤 유형의 사람이 해당 조직을 이끌어야 하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고, 그래서 고위직을 채우는 일은 종종 어려움을 겪는다. 나는 공교롭게도 내가 1순위도 2순위도 3순위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오랜 동안 기금 모금과 비영리단체 경영에 대해 가르치고 글을 써왔지만 한 가지도 실제로 해본 적은 없었다. 나에게 회장직을 제의하기 전에 AEI 이사들이 마지막으로 한 말은 “에라 모르겠다… 기회 한 번 줘봅시다”였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나는 운이 좋았다. 그들은 제의했고 나는 받아들였다.
처음으로 최고경영자로 일하는 건 액면상으로도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나는 일반적인 배움의 과정보다는 더 큰 일을 겪었다. 내가 회장직을 수락한 2008년 중반과 일을 시작한 이듬해 1월 사이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해 비영리단체 분야의 경제상황이 극도로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물가상승률을 감안했을 때 2008년에서 2009년 사이 기부금은 거의 10%가 줄었는데 대부분 2008년 4분기에 줄어든 것이었다. AEI는 정부 보조금이나 연구용역 계약에 의존하지 않고 전적으로 기부금에 의존하는데 내가 첫 출근을 함과 동시에 수입이 급락한 셈이었다. 연구소는 전과 달리 한 푼이라도 벌기 위해 경쟁해야 했다. 나는 새로운 동료들과 함께 기부자들을 설득해야 했다. 경제상황 때문에 기부금을 줄이더라도 왜 다른 곳이 아닌 우리에게는 계속 투자를 해야 하는지, 또 우리의 일에 투자하는 것이 어떻게 실질적인 결과를 만들어 내는지를 말이다.
불황 이전에도 비영리 부문에서는 어떻게 성과를 보여줘야 하는지에 대한 압박이 커지고 있었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업체들은 매출, 주주수익과 같은 측정 항목을 이용해 결과를 계량화할 수 있지만 비영리단체들은 그럴 수 없다. AEI와 같이 순수하게 아이디어로 먹고 사는 비영리단체는 더더욱 그렇다. 우리는 어떤 측정 항목을 사용할 수 있을까. 시간당 영리한 생각의 수? 현대의 자선사업가들 중 상당수는 하이테크 산업에서 막대한 부를 쌓은, 분석적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다. 이들은 그들이 내는 기부금이 실제로 좋은 일을 하고 있는지를 보여달라고 요구한다. 마크 저커버그Mark Zuckerberg와 같은 사람들은 돈을 받고는 측정 가능한 결과물을 보여주지 않는 조직에는 기부하지 않으려 한다. 그의 세대는 그들이 준 것을 통해 가치가 창출됐다는 증거를 보여달라고 요구한다. 데이터를 봐야 하는 것이다. 무형의 제품을 만든다고 봐주지 않는다.
결과물을 보여주거나, 실패하거나. 그것이 AEI 회장으로서 나의 첫 커다란 도전이었다. 일을 맡은 후 첫 2년 동안 뜬눈으로 많은 밤을 지새워야 했다. 하지만 이 도전에 맞서는 일은 새로운 역할을 맡은 나의 개인적인 생존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이었다. 이는 우리가 일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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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호의 기회
불확실한 미래를 가진 비영리단체 관리자가 되기 위해 종신교수직을 버린 건 경솔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건 사실 그 시점까지 내가 삶에서 확립해온 행동패턴과 일치했다.
나는 시애틀의 예술가와 학자 집안에서 자랐다.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 소질을 보였고 빠르게 프렌치호른 연주에 빠져들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입학했지만 1년만 다니고는 미국과 유럽에서 클래식 및 재즈 호른 뮤지션으로 생계를 꾸려 나가기 시작했다.
뮤지션으로 지낸 지 몇 년 지났을 때 바르셀로나 출신의 여자를 만났고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 한 스페인 오케스트라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는 공통의 언어가 없었다. 그러나 최근 결혼 26주년을 기념했고 어른이 다 돼 가는 자녀 세 명이 있는 걸 보면 그 이후 우리의 소통 기술이 나아졌다고 기쁜 마음으로 말할 수 있다.
나는 음악가로서의 삶을 사랑했지만, 학교를 끝마치지 않았다는 사실이 항상 불편했다. 그 성가신 느낌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해 갔다. 그래서 스페인에 사는 동안 통신과정을 통해 대학을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30세 생일을 한 달 앞두고 나는 우편함에서 내 경제학 학사 학위를 꺼내 들었다. 머지않아 음악계를 완전히 떠나 미국으로 돌아와 경제학 석사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이는 공공정책 분석 박사 학위로 이어졌고 나는 대학교수가 됐다. 결국에는 시라큐스대에 안착했다.
학계에 몸담은 10년 동안 나는 행정학과와 MBA 프로그램 학생들을 많이 가르쳤고 연구의 많은 부분은 비영리 경영과 사회적 기업가정신에 초점을 맞췄다. 그 분야에 대한 교과서를 쓰기도 했다. 내가 끊임없이 직면한 핵심 질문 중 하나는 가치 창조에 대한 문제였다. 실체가 있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 비영리단체들은 실제로 가치를 창출하고 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나를 포함해 이 분야는 이에 대해 결코 만족스러운 답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아 보였다. ‘사회적 투자 수익’과 ‘더블 보텀 라인[1]’을 언급할 수 있겠지만 이는 실용적이고 실행 가능한 지침이라기보다는 이론적 개념에 가깝다. AEI로의 이동은 경영의 현실 세계 안에서 이러한 이론적인 퍼즐들을 정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겨졌다.
하지만 AEI로 옮기는 건 매우 개인적인 결정이기도 했다. 나는 이 조직의 핵심 원칙들을 진심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AEI는 엄격한 초당파적nonpartisan입장을 취한다. 즉 정치적으로 얽히는 것과 제도적인 입장을 택하는 것을 피한다. 학자들과 직원들을 하나로 모으는 건 단순한 도덕적 격언에 대한 공동의 헌신이다. 자유기업 제도와 세계 속의 미국의 지도력이 빈곤과 폭압으로부터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한계에 처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투쟁을 떠받치는 기둥이라는 믿음이다. 애초에 내가 경제학이라는 학문에 빠졌던 계기 중 하나는 글로벌 자본주의와 자유무역이 놀랄 만한 속도로 빈곤을 퇴치했다는 것을 배우면서였다. 이제 나는 이 진리를 세상과 나누기 위해 나의 모든 연구를 바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AEI에 대한 나의 깊은 존경심은 사실 약간의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다. 경험이 부족한 경영진으로서 실패를 하고 그 과정에서 조직에 해를 끼치게 되면 어떻게 될까? 회장직을 맡을지 말지 고민하고 있을 때 털리 프리드먼Tully Friedman과 아침 식사를 했다. 그는 프라이빗에쿼티 산업의 개척자이자 AEI의 오랜 이사였으며 나중에 AEI 의사회 의장이자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 중 하나가 됐다. 나는 내가 일을 잘 못해서 75년 역사의 싱크탱크를 위험에 처하게 하면 어떻게 될지에 대해 크게 걱정했다. 그는 “걱정하지 마세요. 기금 모금을 못하거나 학자들에게 동기부여를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1년 안에 당신을 해고할 것이고 AEI는 아무렇지도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이 이상하게도 나를 안심시켜 줬다. 그래서 흥분과 공포가 섞인 채로 나는 종신교수직을 버리고 워싱턴으로 자리를 옮겼다.
[1]Double bottom line. 재무제표의 맨 아랫줄인 순이익에 사회적 영향을 측정한 수치를 추가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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