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 고위직 임원들은 누구보다도 다양한 소통 창구를 가지고 있으나 막상 전달받는 정보는 의심스럽거나 정보로서의 가치가 손상돼 있는 경우가 많다. 리더가 마주하고 있는 역설이다. 경고의 신호는 완화되고 중요한 팩트는 생략되며, 데이터들은 긍정적으로 해석돼 있다.
조언 정보 버블에서 벗어나기 위해 리더는 더 나은 ‘경청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 다른 생각이나 판단을 배제하고 순전히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는 데만 집중해서 들어야 한다. 또한 경청하는 태도를 과잉 각성 상태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시스템과 프로세스를 만들어야 한다.
얻을 수 있는 것 리더가 집중해서 세심하고 체계적으로 경청하면 위험의 초기 신호를 포착하고 잠재적인 위기를 예방하며 기회를 조기에 발견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잘 들을수록 일을 더 잘하게 된다.
필자 중 한 명인 케빈은 1992년 세계 최대 생명공학기업인 암젠Amgen의 사장 겸 COO로 취임했다. 암젠 입사 이전까지 케빈은 미 해군에서 커리어를 시작해 GE와 통신기업 MCI 등을 거치며 어떤 특정 유형의 리더십을 체득해 왔다.
이때까지 케빈이 만난 동료들은 자신감이 있었고 ‘지휘통제형command-and-control’의 리더십을 행사하며 자신들의 기대치를 분명하게 밝히는 스타일이었다. 이런 모습이 자연스럽게 다가왔던 케빈은 같은 스타일의 리더십을 배우고 흡수해 승진 사다리를 따라 빠르게 승진할 수 있었다.
케빈은 회상한다. “내가 이 방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란 걸 5분 안에 증명해 보여주겠다는 자세였죠. 사람들의 말을 중도에 끊고 그 사람들이 하려던 말을 대신해 버리기도 했어요. 시간을 아끼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야 하니까, 사람들에게 어서 명령을 내려야 하니까요. 그래도 괜찮았어요. 그게 통하더라고요.”
하지만 이런 방식은 2000년 암젠의 CEO로 취임하면서부터 통하지 않기 시작했다. 취임 후 새로운 임원진을 구성하고 회사의 매출과 이익을 성장궤도에 올려놓자 케빈은 잡지 표지기사의 주인공으로 발탁되고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케빈의 표현에 따르면 이때부터 자신이 ‘자아의 위험구역ego danger zone’으로 빠져들어 갔다고 한다. 업무에 대한 참여도 줄어들고 지적으로 게을러지기 시작했다. 오후로 갈수록 사장님의 집중력이 약해지기 때문에 3시가 넘어서 사장님과 회의를 잡으면 안 된다는 말이 사내에 돌고 있다고 가까운 부하직원이 귀띔해 주기도 했다.
그 즈음 위기가 닥쳤다. CEO로 재직한 지 7년이 지나는 시점이었다. 암젠이 제조하는 에포젠Epogen이라는 적혈구 생성 자극제는 수익의 3분의 1을 차지할 뿐만 아니라 부작용이 거의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고용량 투여 시 환자에게 심장 부작용을 유발할 위험성이 약간 높아진다는 연구 발표가 나왔다. FDA는 처방법을 변경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 결과 에포젠의 판매량은 크게 줄었다. 수익이 감소하자 케빈은 암젠 역사상 최초의 대량 해고를 명령하고 직원의 14 %를 내보내야 했다.
처음에는 화를 내며 실패의 탓을 다른 사람에게 돌렸다.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한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저는 조급하고 오만해져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문제를 해결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이었다. 케빈은 산타모니카의 한 식당에 홀로 앉아 식사를 함께 하기로 한 딸과 사위를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오랜만에 조용한 순간이 찾아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자 한 가지 생각이 언뜻 스쳤다. 에포젠 일을 그르친 건 자신이었고 그건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지 않았기 때문임을 깨달았다.
케빈은 그날부터 더 잘하기로 결심했다. 미팅이 있을 때는 여덟 가지 일을 한꺼번에 생각하는 대신 대화에 집중하기로 했다. 모든 대화를 주고받는 거래라 생각하며 상대방이 말하는 도중 끼어들어 명령을 내리기보다는 전후 사정을 물어보고 제안을 요청하기로 했다. 또한 정기적으로 설문조사와 대화, 피드백이 이뤄질 수 있는 메커니즘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다. 회사 내외에 소통창구를 마련함으로써 위험의 초기 신호나 기회를 조기 포착하려는 의도였다.
케빈은 리더가 제대로 경청하려면 두 가지 핵심 요소가 충족돼야 함을 알게 됐다. 첫째, 다른 생각이나 판단을 배제하고 순전히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는 데만 집중해서 들어야 한다. 둘째, 그저 열심히 남의 말을 듣자는 정도가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과잉 각성 상태로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시스템과 프로세스를 만들어야 한다. “진정한 경청은 단순히 테이블 건너편에 있는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업 생태계 전체에 대한 경각심을 유지해야 하죠. FDA 규제기관의 의견, 이사회와의 대화, 언론 기사, 사내에 떠도는 이야기 등 신호는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강도로 옵니다. 그 모든 소리를 듣고 신호와 잡음을 구분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죠.” 케빈의 말이다.